청량산 속의 청량사


 

오지에 꼭꼭 숨겨놓은 낭만이 있는 곳

봉화는 오지였다. 지금은 대한민국 어디든지 못 갈 곳이 없지만 예전엔 영주, 안동, 태백 사이에 낀 깊은 산골마을이었다. 그런 봉화가 이제는 가을과 썩 잘 어울리는 산림휴양도시다. 빨갛게 익어가는 사과와 가을빛 물드는 청량산, 남자의 로맨스가 있는 계서당까지 봉화는 우리에게 가을을 선물한다.



◆ 사과길 따라 청량산까지


청량산 가는 길엔 사과가 많다. 따 먹기 좋게 빨개진 사과는 나무 줄기가 버티기 어려워 보일 정도로 주렁주렁 달렸다. 봉화사과 빛깔이 유난히 좋은 이유는 여기가 고지대기 때문이다.

일명 고랭지사과. 기온차가 심하고 일조량이 많아서 사과가 더 빨갛고 예쁘게 익는다고 한다. 여유가 있다면 차를 세워 보는 것도 좋다. 어렵지 않게 농장의 사과따기 체험을 해 볼 수 있다. 나무에서 바로 딴 사과는 슈퍼마켓에서 사 먹는 것과는 맛의 차이가 확연하다. 모든 열매가 다 그렇겠지만 나무에서 금방 땄기 때문에 맛과 함께 생기가 들어있다.

사과 하나를 물고 조금 더 가면 청량산도립공원이다. 우리나라에선 산이 아름다우면 ‘소금강’이라 불리곤 하는데 청량산도 어김없이 이 별명을 가졌다. 이곳은 태백산맥의 줄기로 낙동강이 돌아 나간다. 12개의 봉우리가 산을 둘렀는데 그 모습이 마치 연꽃잎 같다고 한다. 사실 이 계절의 청량산은 연꽃보다 강렬하다.


단풍 사이로 가는 트래킹은 꽃놀이와는 또 다른 맛이 있다. 산길 사이로 멀리 보이는 절벽에는 단풍 든 나뭇잎이 수를 놓은 병풍 같다.

청량산은 유난히 문인과 승려에게 사랑 받은 산이다. 이곳에 27개의 절과 암자 터가 있고, 수도의 흔적이 다수 남아있다. 퇴계 이황 선생은 도산서원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학문을 연구했지만 수시로 이곳 청량산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오산당’은 그가 수도하며 성리학을 집대성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신라시대에는 김생이 이곳을 좋아했다.

청량정사 뒤편의 절벽에는 ‘김생굴’이 있다. 신라명필 김생이 이 굴 앞에 김생암이라는 암자를 짓고 10년간 글씨 공부를 했다고 하는데, 붓을 씻었던 우물의 흔적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한편 고려시대 공민왕도 홍건적의 난을 피해 청량산에 은신했다. 오마대와 공민왕당, 공민왕이 쌓았다는 청량산성이 그의 이야기를 전한다.

청량산이 가을과 어울리는 이유는 특산물 때문이기도 하다. 송이버섯과 대추가 유명해 가을에는 송이축제가 열린다. 송이가 있다는 것은 좋은 소나무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청량산에는 사찰 건축재로 쓰인 춘양목이 있어 화려한 단풍과 곧고 푸른 소나무의 어울림이 조화롭다.


 

봉화사과
늦은 오후의 청량사

◆ 가을 산에 안긴 청량사

청량사와 청량산은 같은 의미로 쓰일 때가 많다. 그도 그럴 것이 청량산 전체에 33개 암자가 있었다. 신라 문무왕 3년(663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이 사찰에는 봉우리마다 암자가 있어 스님들의 독경소리가 청량산을 가득 메웠다고 한다.

위치도 절묘해 청량산 중턱 연화봉 기슭 한가운데에 자리잡았다. 마치 산 속에 푹 안긴 듯 층마다 위치한 전각과 석탑이 천년고찰의 고즈넉함을 더한다. 같은 이유로 청량산의 봉우리들을 볼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기도 하다. 봉우리의 이름도 불교의 영향을 받아 보살봉, 의상봉, 반양봉, 문수봉, 원효봉 등으로 불렸다. 지금의 이름은 1544년 풍기군수였던 주세붕이 지었고, 이 모두를 일컬어 ‘청량산 육육봉’이라 부르게 됐다.

한마디로 ‘산사’라는 말이 정확히 어울린다. 골이 깊어서 오르는 길은 다소 가파른 편이다. 그래도 짧은 길을 원한다면 깔딱고개 같은 등반길을 택하고, 여유로운 산행을 하고 싶다면 조금 돌아오더라도 단풍 보고 사진 찍으며 오르면 된다. 일주문에 도착했다고 끝이 아니다. 한발 한발 오를 때마다 청량사는 그 진짜 모습을 하나씩 하나씩 보여줄 것이다.

절벽 끝에 놓인 석탑은 감탄이 나온다. 탑이 가진 단정한 모습과 자유롭게 물든 산색의 조화가 아름답다. 늦은 오후라면 하얀 석탑에 붉은 빛이 물들어 그 감동이 더할 것이다. 한편 소나무를 걸친 금탑봉도 산행의 피곤을 잊게 한다. 청량사에서는 가까운 사물과 멀리 있는 산의 풍경이 극적으로 어울려 보는 감동이 있다.

아직 더 산이 고프다면 하늘다리까지 올라가 본다. 해발 800m 위에 선학봉과 자란봉을 연결하는 90m의, 국내에서 가장 긴 산약현수교량이다. 다리가 떨리고 어지럽다면 다시 청량사로 내려와 약사여래상 앞에서 마음을 가라앉히면 될 일이다. 청량사 약사여래상은 종이재질의 ‘지불’이라는 것이 특이하다. 이곳에서 간절히 소원을 빌면 아픈 곳을 낫게 해 준다는, 청량사에서는 놓쳐서는 안될 포인트이기도 하다.


계서당

◆ 그 남자의 집, 계서당

이번엔 계서당이다.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 하니 로맨틱한 남자를 만나러 왔다. 그의 이름은 이몽룡. 이몽룡이라 하면 <춘향전>이고 춘향이라 하면 남원일 텐데 뜬금없이 봉화라니? 그나저나 이몽룡이 실존했던 인물이라고?

계서당은 계서 성이성의 생가다. 창녕 성씨로 남원부사를 지낸 성안의의 아들, 인조 5년 문과에 급제한 후 4차례 암행어사로 파견됐다고 한다. 남원과 암행어사라…. 그렇다. 그가 바로 <춘향전> 이몽룡의 실제 인물이다.

이야기를 각색하는 과정에서 ‘성’이라는 성씨는 여주인공 춘향이가 가져가고, 남주인공 자신은 ‘이’씨 성을 쓰게 됐다는 말이다. 그 유명한 <춘향전>에 실존인물이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곳에 살고 있는 후손의 말씀인 즉, 점잖은 양반집에서 어린 나이의 사랑이 무슨 자랑이었겠는가.

그 시대에는 양반들이 애인 갖는 것은 그리 흉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성이성은 춘향에게 순정이었다. 성이성이 이몽룡의 실제 인물임을 가장 강력하게 증명하는 것은 바로 그의 시이다. ‘금준미주(金樽美酒)는 천인혈(天人血)이요, 옥반가효(玉盤佳肴)는 만성고(萬姓膏)라’ 라는 시는 성이성이 쓴 것으로 4대 후손 성섭이 지은 <교와문고 3권>에 수록돼 있다.

‘금동이의 아름다운 술은 백성의 피요, 옥소반의 아름다운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는 이 유명한 대사는 춘향전 소설, 드라마, 영화에 빠짐없이 등장한다. 서양의 로미오와 줄리엣도 16살에 사랑을 했다. 요는 더 이상 우리 조상의 로맨스가 부끄럽지 않다는 말인 듯 하다. 아니, 자자손손 고전문학으로 남았으니 사랑을 하려면 이 정도는 했어야 하지 않나. 이제는 자랑거리가 된 조상님의 순정이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믿거나 말거나’일지 모르지만, 오래된 조선시대 전통가옥을 지키며 여행자에게 할아버지의 사랑이야기를 들려주시는 어르신을 만나는 것이 가을 밤에 먹는 야식처럼 달고 고소하다.

애초부터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는 뻔한 클리셰를 찾아 온 것은 아니었다. 다만 붉게 떨어지는 나뭇잎에는 분명 특별한 것이 있다. 남자가 아니라도 우리 모두는 이런 색깔, 이런 바람, 이런 변화에 반응하는 ‘무엇’을 다소간 가지고 있다. 여행을 통해 풍부해질 수도, 해소할 수도 있는 그것, 가을의 ‘감성’ 말이다.

● 여행 정보

 

☞ 봉화 청량산 가는 법
[승용차]
경부고속도로 – 영동고속도로 – 중앙고속도로 – ‘소백산국립공원, 풍기, 봉화’ 방면으로 우측방향 – 소백로 – ‘안동, 영주, 봉화’ 방면으로 좌측방향 – 죽령로 – 신전교차로에서 ‘울진, 안정’ 방면으로 우측방향 – 신전교차로에서 좌회전 – 신재로 – 서천교사거리에서 ‘봉화, 경찰서, 안동, 예천, 시청’ 방면으로 우측방향 – 선비로 – 영주육교 진입후 구성로 – ‘봉화, 시의회, 경찰서’ 방면으로 좌회전 – 광복로 – 상망교차로에서 ‘울진, 봉화’방면으로 우회전 – 원당로 – 금봉교차로에서 ‘청량산, 영양, 봉성’ 방면으로 우회전 – 봉명로 – 도천삼거리에서 ‘안동, 재산, 영양’ 방면으로 우회전 – 청량로 – ‘명호’ 방면으로 우회전 – 노루목재길 – 청량산삼거리에서 ‘청량산도립공원’ 방면으로 좌회전- 청량산길

[대중교통]
봉화에서 청량산 행 버스 탑승 – 청량산 하차
안동시에서 67번 버스 탑승 – 청량산 하차

[주요 스팟 내비게이션 정보]
청량산: 검색어 ‘청량산도립공원’ / 경상북도 봉화군 명호면 청량로 255
청량사: 검색어 ‘청량사’ / 경상북도 봉화군 명호면 북곡리 청량사
계서당: 검색어 ‘계서당’ / 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 301

< 주요 정보 >
청량산도립공원
054-679-6653 / http://mt.bonghwa.go.kr

청량사
054-672-1446 / http://www.cheongryangsa.org

< 음식 >
까치소리: 청량산 등반 전에 들러 가기 좋은 집이다. 더덕구이를 비롯한 더덕회, 버섯회 등 산에서 나온 건강 식재료로 음식을 선보이며 청량산 특산물인 송이요리도 맛볼 수 있다. 봉화의 맛집 답게 사과김치가 나온다.
더덕구이정식 1만원 / 산채비빔밥 8000원 / 송이덮밥 1만5000원
054-673-9777 / 경상북도 봉화군 명호면 관창리 1730-1

< 숙소 >
봉화황토테마파크: 황토집 9개 동과 함께 농작물체험장, 운동시설, 신재생에너지 체험장 등이 있어 가족과 함께 머물거나 워크숍 하기 좋다.
황토집 요금:(1박) 8만~12만원
예약문의: 054-672-6055
http://www.hyw.kr / 경상북도 봉화군 소천면 현동리 311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353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