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뉴엘 사태가 은행권에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은행들이 대규모 대출사기에 연류됐기 때문. 모뉴엘 채권은행은 기업·수출입·산업·외환·국민·농협은행 등 6개 은행이다. 각 은행들은 현재 제2의 모뉴엘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 거래 중소기업을 상대로 여신 심사과정을 재심사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모뉴엘 사태에서 한발 벗어난 은행들은 "우리는 금융시스템 흐름에 맞춰 대출지원이 되기 때문에 중소기업(창조기업) 지원 축소는 없다"고 선을 그었지만 중기대출 지원축소는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3조원대 대출사기 은행권 충격
모뉴엘은 컴퓨터를 비롯해 로봇청소기 등 가전제품을 제작, 판매해 온 IT기반의 종합가전회사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이 지난 2007년 세계 최대 가전전시회(CES) 기조연설에서 모뉴엘을 주목할 만한 회사로 지목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또한 수출입은행이 2012년 히든 챔피언 인증기업으로 선정할 만큼 유망기업으로 평가받았다. 특히 전체 매출 중 80%가량을 해외수출이 차지하고 지난해 매출 1조원대를 올리기도 했다.
그런데 지난 10월20일 모뉴엘이 갑자기 법정관리 신청을 하면서 상황은 급반전됐다. 관세청 조사결과에 따르면 모뉴엘의 매출 1조원과 해외수출은 모두 분식회계로 조작한 가짜매출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의 사기에 금융권이 대부분 속았고 이를 통한 피해규모가 3조원을 넘는다는 점이다. 박홍석 모뉴엘 대표가 거래·협력업체와 '짜고 친' 사기행각의 실태가 속속 드러난 셈이다.
모뉴엘은 지난 2007년부터 부실조짐을 보였다. 당시 모뉴엘이 미국에 수출한 홈시어터 PC(HTPC) 물량 상당수가 품질저하, 고장, 불량 등 고객불만으로 반품되면서 위기에 빠지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2008년에는 급속한 유동성 위기를 맞았다. 당시 모뉴엘 홈페이지와 포털에선 HTPC에 대한 불만글이 쇄도했다.
이에 박홍석 대표는 수출했던 제품을 다시 들여와 과거 수출한 기록을 근거로 금융권으로부터 대출을 받았다. 불가능할 것 같은 허위서류로 은행대출에 성공하자 2009년 미국과 중국의 대형 인터넷쇼핑업체를 끌여들여 판을 키웠다.
폐기처분된 PC, 반품된 HTPC 등을 고가 컴퓨터로 위장해 미국 유명쇼핑몰 A사 등에 수출하고 현지에 설립한 해외법인 등을 통해 몇차례 물건을 돌린 뒤 수출했던 제품을 다시 한국으로 수입한 것이다.
이를 몰랐던 무역보험공사는 당시 모뉴엘 대출보증을 섰고 수출채권까지 발행해 은행에서 닥치는대로 자금을 끌어모았다. 국책은행과 시중은행에서 이런 식으로 빌린 돈이 무려 3조2000억원에 달했다.
금융권의 한 고위 관계자는 "중견기업이 허위자료를 통해 수조원대의 자금을 6년간 돌려막기 했는데 이를 은행이 몰랐다는 것은 충격"이라며 "모뉴엘 재무제표 등에 조금만 관심을 기울였다면 이런 초유의 사태는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KT ENS 사태 1년도 안됐건만…
중견기업의 은행 사기대출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2월 KT ENS 및 협력업체 직원들이 허위 매출채권을 발행하는 방식으로 특수목적법인(SPC)을 통해 1조8000억원에 달하는 대출을 받아 논란이 불거진 바 있다.
당시 KT ENS는 1조8000억원 가운데 3000여억원을 갚지 않아 사기 전모가 드러났다. 때문에 1년도 채 안돼 모뉴엘 사태로 또 다시 대출의 허술함을 만천하에 드러낸 은행권으로선 더욱 뼈아픈 경험으로 남을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모뉴엘 사태에 대해 기술금융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어이없는 사건이라고 입을 모은다. 기술금융이라고 하더라도 기술만 보고 대출을 지원하는 것은 너무 순진하다는 것. 기술 이외에 미래가능성과 재무적 능력, 조직현황 등 은행 직원이 직접 현장방문을 통해 종합적인 진단을 내린 후 결정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러한 가운데 금융당국이 은행의 대출거래 현황을 다시 손보기로 했다. 최수현 금융감독원장은 "담보나 보증서만 믿고 이자만 내면 대출하는 관행을 근절하도록 하겠다"고 천명했다. 그는 또 "기업의 도덕성, 의지, 정직 등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들이 은행에서 신용평가에 반영될 수 있는 관계형 금융을 조만간 발표할 예정"이라고 강조했다. 앞으로 기술력과 명성만 갖고 자금을 지원하는 현재의 대출관행을 바꾸겠다는 의미다.
이와 함께 은행권도 이번 모뉴엘 사태를 계기로 중견기업 대출 솎아내기에 나섰다. 은행 자체적으로 중견기업 재무현황을 꼼꼼히 확인하고 혹여 불안요소가 있다면 자금회수에 나설 계획이다.
은행권 관계자는 "현재의 인력으로 연간 수조원에 달하는 중견기업의 대출을 꼼꼼히 확인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정부에선 기술금융을 늘리라고 하지만 모뉴엘과 KT ENS처럼 사기 위험이 큰 것이 사실이다. 지금으로선 기술금융 지원을 축소할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이를 두고 업계 안팎에선 기대보다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자칫 우수 중소기업에게도 대출지원 축소의 불똥이 튀는 건 아닌지 우려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 여기에 박근혜 정부가 내세운 공약 중 하나인 기술금융 자체에 대한 위기론도 제기되는 실정이다.
금융당국의 정책에 대해서도 날 선 비판이 나온다. 정부의 말만 듣고 은행에 반강제적으로 기술금융 지원을 강요하다가 논란이 불거지면 은행만 탓하는 행태가 못마땅하다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금융권 관계자는 "기술금융 대출 시 은행들은 금융당국에서 제시한 모든 규제에 맞춰 지원했다"며 "그런데 막상 사고가 발생하면 모든 잘못을 은행에 뒤집어 씌운다. 금융당국이 완벽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게 우선 아니냐"고 꼬집었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357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저작권자 © ‘재테크 경제주간지’ 머니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