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돈 쓰듯… 수장의 모럴해저드
장 전 사장의 비리는 전형적인 공기업 임직원의 비리형태를 보여준다. 그는 한국가스공사 사장으로 취임하기 전인 지난 2011~2013년 예인선업체 A사 대표로 있었다. 그러면서 이 회사 이사 6명에게 보수한도인 6억원을 초과해 무려 29억9000만원을 더 책정해 나눠 가지도록 했다. 또 자신의 가족 해외여행 경비를 법인카드로 쓰는 등 회사에 30억3000만원 상당의 손해를 끼친 혐의로 지난해 12월 불구속 기소됐다.
가스공사 사장으로 취임한 후에도 장 전 사장의 도덕불감증은 여전했다. 지난 2013년 7월 사장직에 오른 이후 1년 2개월 동안 그는 A사로부터 법인카드를 받아 1억6300만원어치를 사용하는 등 2억8900만원 상당의 금품과 향응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A사는 가스공사의 LNG(액화천연가스) 수송선 예인업무를 독점하고 있어 A사에게 장 전 사장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공기업 상당수가 이처럼 독점적인 사업영역에서 ‘갑’의 위치에 있는 만큼 관련업체로서는 해당 공기업과의 관계형성을 중요하게 여길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공기업 임직원들의 비리가 ‘관행’처럼 굳어지고 있는 게 대한민국 공기업의 씁쓸한 현실이다.
새해 첫날부터 한국무역보험공사(이하 무보)의 조계륭 전 사장은 가전업체 모뉴엘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 단기 수출보험과 수출 신용보증 편의를 봐달라는 청탁과 함께 모뉴엘에서 8000여만원을 수수한 혐의다. 모뉴엘은 무보의 보증을 근거로 시중은행 등 10여곳에서 3조2000억원을 대출받았지만 지난해 12월 끝내 파산했다. 이로 인해 무보 측의 손실액만 3256억원에 달한다. 공기업 수장의 잘못된 선택이 국민혈세를 낭비한 꼴이다.
조 전 사장과 비슷한 혐의를 받는 공사 사장은 또 있다. 김종신 전 한국수력원자력 사장은 원전 용수처리 업체로부터 청탁을 받은 혐의로 얼마전 구속 기소됐고 한국동서발전의 장주옥 사장 역시 사내 인사청탁의 대가로 거액의 금품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지난 한해 한국수력원자력 직원들이 부품시험 성적을 조작해 주고 납품업체로부터 금품을 받아 전 국민의 공분을 산 것이 벌써 옛 기억이 될 만큼 공기업 임직원들의 부정행위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제 식구엔… 뒷돈 챙겨도 '경징계'
비리혐의에 연루된 장석효 사장의 ‘퇴출’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가스공사 이사회가 장 사장의 해임안을 부결시켰기 때문이다. 당초 가스공사 사외이사 7명은 지난 1월7일 장 사장의 해임결의안을 표결에 부쳤으나 3분의 2밖에 찬성이 나오지 않아 부결(찬성 4표, 반대 3표)됐다. 해임안이 가결되려면 5명이 찬성해야 하는데 1표가 모자란 것. 결국 주무기관인 산업통상자원부가 나서서 임면권자인 대통령에게 건의했고 대통령이 재가하면서 장 사장의 해임이 최종 결정됐다.
그런데 이사회 부결 과정이 탐탁치 않다. 사외이사들이 기명이 아닌 무기명 표결로 해임 안건을 처리한 게 문제가 된 것이다. 상법상 이사회의 주요 안건에 반대하는 사람과 이유는 의사록에 기재하도록 돼 있다. 따라서 가스공사는 공기업이지만 주식회사여서 상법의 적용을 받는데도 사외이사들의 무기명 표결이 이뤄져 법을 어겼다는 비판이 거세다.
경제개혁연대 관계자는 “가스공사 이사회가 사장 해임이라는 중대한 안건을 처리하면서 무기명 표결한 것은 심각한 법률 및 규정 위반”이라며 “이사회는 사장 해임 안건을 무기명 표결로 처리함으로써 외부감시 자체를 봉쇄했다. 이는 명백한 책임회피이자 직무유기”라고 꼬집었다.
우여곡절 끝에 장 사장 해임으로 이사회 표결 불법논란은 일단락됐지만 이번 사례는 비리 임직원에 대한 공기업의 ‘제 식구 감싸기’식 행태를 여실히 보여준다.
지난해말 한국석유공사 역시 거액의 뇌물을 수수해 파면된 비리직원에게 임금과 퇴직금까지 챙겨줘 문제가 된 적이 있다. 지난 2009년 석유공사가 카자흐스탄의 석유기업 숨베(Sumbe)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매각자측 브로커로부터 협력대가로 뇌물을 수수한 B씨에게 파면 조치 이전까지 13개월간 임금과 퇴직금 등 1억6000여만원을 지급했다.
한국수자원공사는 정도가 더 지나쳤다. 지난해 수공은 직원 C씨가 공사를 수주한 시공사로부터 법인카드를 받아 부서 회식비와 국토부 공무원의 접대비로 사용했는데도 처벌은 경징계인 '감봉 1개월'에 그쳤다. D씨도 계약부서 등 직원들을 업체에 소개한 대가로 브로커로부터 수차례 향응을 받았는데도 '감봉 3개월' 처분만 받았다.
한국도로공사 또한 뇌물·향응 수수의 비리를 저지른 직원들에 ‘솜방망이 처벌’을 내려 빈축을 샀다. 지난 2008년 이후 도공은 자체 비리직원 20명을 적발했지만 이 중 12명은 경고·견책 등 가벼운 처분을 받았다. 불법 인터넷 도박을 하거나 강원랜드 카지노에 출입하다 적발된 직원도 11명이나 됐지만 도공은 '주의' 등의 제재를 내리는데 그쳤다.
◆짜고치는 '낙하산 인사' 언제까지
낙하산 논란도 이번 가스공사 비리사건과 연계된 한국 공기업의 문제점 중 하나다. 장석효 사장은 지난 1983년 가스공사에 입사해 2011년 자원사업본부장을 끝으로 회사를 떠났다. 그러나 퇴사 이후 업무관련성이 깊은 예인선업체 A사 대표이사로 자리를 옮겼다. 연매출 100억원을 올리고 있는 A사는 설립 후 지난 2013년까지 가스공사 간부 출신이 대표이사로 계속 재직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장 사장 외에도 가스공사는 임원 선임 때마다 줄곧 낙하산 인사 논란으로 시끄러웠다. 장 사장 직전의 주강수 전 사장은 현대종합상사 부사장 출신으로 대표적인 ‘MB 낙하산’으로 불렸다. 현 정부 들어서도 지난 2013년 6월 임시주주총회에서 새누리당 당직자 출신의 장만교 후보가 비상임이사 후보로 추천된 후 최종 선임돼 논란을 키웠다.
주택전문 보증공기업인 대한주택보증 역시 최근 박근혜 대선 캠프 출신인 김선덕 건설산업전략연구소장을 신임 사장으로 선임해 곱지않은 시선을 받고 있다.
경제개혁연대 측은 “공기업이나 공공기관장의 자리에는 ‘CEO 승계 프로그램’을 도입해 운영할 필요가 있다”면서 “CEO 인력 풀을 만들어 후보의 자격요건과 검증방법, 추천절차 등을 구체적으로 명문화해 투명하게 운영하면 낙하산 인사를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368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저작권자 © ‘재테크 경제주간지’ 머니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