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 이후 최대 금융사기 사건은 금융실명제가 실시되기 전인 1982년 터졌다. 권력형 금융비리의 대표적 사건으로 회자되는 대규모 어음 사기사건의 주인공은 5공 시절 지하경제의 큰 손 장영자씨다.

대담함과 화려한 언변에 미모까지 갖춘 장영자씨는 당시 사채시장의 큰 손으로 통했으며 전두환 전 대통령의 처삼촌 이규광씨(이순자 여사의 삼촌)의 처제다.


국회의원과 중앙정보부 차장을 지낸 남편 이철희씨를 내세워 고위층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면서 기업에 자금을 대줬다. 그 대가로 2~9배에 달하는 어음을 받아 7111억원의 어음을 사채시장에 유통시키고 그 중 어음 사기행각을 벌인 액수가 6400억원이 넘었다. 현 시점으로 환산하면 수조원에 달한다. 어음을 발행한 기업들이 부도를 내며 무너지기 시작했고 이 사건을 계기로 금융실명제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탈세, 금융실명제→ 차명계좌

김영삼 전 대통령의 최고업적으로 꼽히는 것이 금융실명제 전격 실시다. 은행예금이나 증권투자 등 금융거래를 실제 명의로 해야 하고 가명이나 무기명거래는 인정하지 않은 것.
금융실명제는 금융거래를 정상화해 탈세, 금융사기, 각종 비리 등 사회부조리를 없애고 조세형평성을 높여 합리적인 과세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도입됐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차명은 여전히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다. 무기명이 아니고 명의는 있지만 돈의 실제 주인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이름을 사용하는 사례가 흔했다.

차명계좌는 불법적으로 자금이 이동하는 통로가 됐고 탈세창구로 활용됐다. 차명거래로 인해 음성적인 지하경제시장이 여전히 큰 규모로 유지됐다. 페이퍼컴퍼니는 물론 노숙인 이름을 빌려 차명계좌를 만든 사례가 드러나기도 했다.

차명계좌를 통해 해외로 나간 자금은 추적해도 파악하기 힘들다. 정·재계 거물들의 비자금 뒤에는 어김없이 차명계좌가 자리했다. 가장 큰 규모로는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세월호 사고 당시 유병언씨 등이 꼽힌다.


 


◆전 대통령 뺨치는 유병언 탈세

전두환 전 대통령은 지난 1997년 4월, 군형법상 반란·내란 및 뇌물수수 혐의로 기소돼 대법원에서 무기징역형과 추징금 2205억원을 선고받았다. 이후 사전에 장남 재국씨와 차남 재용씨 명의로 해놓았던 재산 중 870억원이 검찰에 압류됐다. 전 전 대통령은 추징금의 4분의 1만 납부하고 남은 금액을 내지 않은 채 “전 재산이 29만원”이라고 말해 전국민의 빈축을 샀다.

노태우 전 대통령 역시 같은 시기 징역 17년과 추징금 2628억9600만원을 확정받았고 이 중 2397억여원을 납부했다. 그는 미납분을 내기 위해 동생인 노재우씨와 사돈인 신명수 전 신동방 회장에게 맡긴 재산을 환수해 달라는 탄원서를 제출한바 있다. 추징금을 완납하기 위해 차명재산을 환수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막대한 재산을 소유한 유병언씨는 실명재산은 예금 17억4000만원뿐이었다. 그러나 자녀들, 측근, 계열사 등으로 명의를 바꿔놓은 차명재산은 천문학적 금액으로 추정된다. 예금보험공사는 유벙언 일가가 해외로 송금한 돈까지 추적해 미국에서 재산회수 소송을 진행 중이다.

드디어 차명계좌금지법이 지난해 11월29일 전면 실시됐다. 조세포탈, 비자금 조성, 자금은닉 등의 목적으로 이뤄지던 차명거래를 원천 금지하기 위해 금융실명제법이 강화된 것이다.

차명은 평범한 일반인, 자영업자들도 여러 목적으로 활용했다. 은행 파산 시 예금자보호법에 의해 5000만원 이하의 예금만 보장받으므로 통상 가족 명의로 분산시켜 예금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처럼 예금을 보호 받기 위한 선의의 차명계좌도 있지만 세금을 줄이기 위해 차명을 활용하는 경우도 많았다. 증여세를 내지 않기 위해 증여세 감면범위를 초과한 금액을 가족 명의 계좌에 예금하거나 이자소득과 배당금 등 신고금액을 줄여 금융소득종합과세를 피하기 위한 목적으로 자녀, 친척, 조카 등 여러 사람 명의로 금융상품에 가입하는 경우다.

또 세금우대상품의 1인당 가입한도 제한을 피하기 위해 예금을 분산한 사례도 찾을 수 있다. 심지어 빚을 진 다음 빚을 갚지 않고 채권자들의 강제집행을 피하기 위해 본인 자금을 타인 명의계좌에 예금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강화된 금융실명제법, 걸리면?

금융자산을 가진 실소유자와 명의자 사이 합의가 이뤄지면 예전에는 정상적인 금융거래로 인정했지만 개정된 금융실명거래법은 불법거래로 간주해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다. 세금 추징에 그쳤던 처벌 수위가 개정안에서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의 벌금으로 강화됐다. 금융회사도 기존 500만원 이하에서 건별 30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내야 한다.

이제는 본인 명의의 계좌를 적법하게 유지하면서 관리하기 위해 금융실명제법이 어떻게 달라졌고 강화된 내용은 무엇이며 앞으로 어떤 점에 유의해야 하는지 숙지해야 한다.

기존 금융실명거래법은 명의를 빌린 실소유주의 소유권을 인정했지만 개정안은 명의자 소유로 판단한다. 따라서 명의를 빌려준 사람이 자신의 금융자산이라고 주장하면 실소유주는 재판을 통해 자신의 자산임을 입증해야 한다.

이 경우 소송과정에서 불법행위가 드러나면 처벌받게 된다. 명의를 변경하면 차명계좌였음이 인정되므로 그에 수반하는 추가 세금을 납부해야 한다.

다만 예외조항으로 ▲동창회·계모임·친목모임의 회비를 총무가 본인 명의계좌로 관리하는 경우 ▲문중·교회 등 임의단체의 자산을 관리하는 경우 ▲단체 마케팅을 통해 특정 학교 학생과 특정 회사 근로자의 예금을 일괄유치하는 경우 ▲미성년 자녀의 재산을 부모 명의계좌로 관리하는 경우 ▲증여세 감면범위까지 가족 명의로 예금하는 경우 ▲공모주 청약 시 1인당 한도 이상 청약하기 위해 다른 사람 이름으로 청약하는 경우 ▲금융투자회사가 고객의 요구에 의해 회사 명의로 한 거래 등은 합법으로 인정한다.

실명제가 강화된 이후 고액자산가들은 차명계좌에 돈을 넣지 않고 5만원권 현금으로 바꿔 보유하거나 골드바 또는 실버바를 매입하는 분위기가 전해진다.
한국은행이 발행한 5만원권 환수율이 처음으로 10%대로 떨어졌고 인터넷쇼핑몰에서 개인금고 판매량이 크게 증가했다는 보도가 이를 방증한다. 골드바와 실버바도 판매량이 급증했다. 도둑도 수준이 천차만별이라서 금고에 현금을 넣어둬도 안심할 수 없다.

지난 2011년 4월 전라북도 김제의 한 마늘밭에서는 현금 110억원이 발견돼 전국이 떠들썩했다. 또한 연예인이 죽은 후 벽 속에서 다량의 지폐가 발견된 적이 있고 이스라엘에서는 한 여성이 노모의 매트리스를 교체하다가 한화 11억여원을 발견한 사례도 있다.

현금을 금과 은으로 바꿀 때는 리스크를 감수해야 한다. 가격이 오를 수도 있지만 최근 원자재 및 귀금속 가격의 변동성이 크기 때문에 대폭 하락할 위험성도 있어서다.

개정된 금융실명거래법은 불법을 막기 위한 것인 만큼 선량하게 사는 사람이라면 염려할 것이 없다. 지금까지는 관행상 차명계좌로 자금을 관리하면서 법인은 비자금을 조성하고 개인은 세금을 누락시켰다.

그만큼 자금관리의 불법성에 대해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사고방식이 사회에 퍼져있다. 공평성이 담보되는 투명한 사회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거액이든 소액이든 누구라도 정직하게 돈을 관리하는 것이 필수조건이다. 자기명의의 자산을 떳떳하게 늘리는 과정에서 내야 할 돈(세금)을 내도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면 된다.

이승에서 내야할 돈을 내지 않으면 저승 가서 내야하고, 이승에서 돈을 낸 만큼 저승 가서 그 돈을 받아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이 생각난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설 합본호(제370·371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