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의 초시계가 빨라지고 있다. 삼성물산은 오는 7월17일 임시 이사회를 열고 합병 여부를 결정한다. 하지만 변수가 적잖다.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삼성물산 지분 7.12% 보유)가 법원에 삼성물산 합병비율이 불공정하다며 주주총회 결의 금지 가처분을 신청해 엘리엇과 삼성물산의 정면 표대결이 불가피하게 된 것이다.

엘리엇의 전방위 공세가 격해지면서 캐스팅보트로 떠오른 국민연금공단의 선택에 재계의 이목이 집중된다. 국민연금은 삼성물산 지분 9.98%를 보유한 최대주주다. 통합 삼성물산의 운명이 사실상 국민연금 손에 달려 있는 셈이다.


◆통합 삼성물산 주주가치가 잣대

국민연금이 누구의 편에 설지 예측하긴 어렵다. 국민연금도 이에 대해 "아무 것도 결정된 것이 없다"며 말을 아꼈다.

다만 과거 사례를 통해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 셈법을 유추할 수는 있다. 국민연금이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판단의 잣대는 역시 주주가치 증대다. 과거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 현대제철과 현대하이스코, KT와 KTF 등의 합병이 대표적인 예다.


국민연금은 지난해 11월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 합병에 반대해 양사 통합이 무산된 바 있다. 당시 국민연금은 삼성엔지니어링 지분 5.90%, 삼성중공업 지분 5.91%를 보유 중이었다. 당시 국민연금의 합병 제동 명분은 주가하락에 따른 주주가치 훼손이 우려된다는 것이었다.

국민연금 /사진=뉴스1 손형주 기자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은 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는 주가 기준을 각각 2만7000원과 6만5439원으로 결정했다. 하지만 합병을 기약한 그해 11월17일 삼성중공업 주가는 2만5750원, 삼성엔지니어링 주가는 6만600원에 불과했다.
주가가 떨어지자 국민연금은 주식매수청구권을 신청했다. 주식매수청구권은 합병을 반대하는 주주가 자신의 주식을 회사가 사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권리다. 합병 직전 주식매수청구액 규모가 1조6000억원을 넘어서자 삼성은 합병 포기를 선언했다.

통합을 앞둔 현대제철과 현대하이스코 냉연부문 합병 건에 대해서도 국민연금은 의결권을 행사했다. 국민연금은 현대제철 지분 8.1%, 현대하이스코 지분 6.1%를 보유 중이다.

국민연금은 지난 2013년 12월 현대제철에 합병 '찬성표'를 던진 반면 현대하이스코에는 '반대표'를 던지며 주식매수청구권을 확보했다. 반대표를 던진 이유는 주주가치 훼손 때문이다. 그러나 국민연금의 반대에도 이 안건은 찬성률 84%로 임시주주총회에서 승인됐다.

반면 KT와 KTF 합병에선 든든한 우군 역할을 자청했다. 양사의 합병을 추진했던 시기는 지난 2006년. 국민연금은 최대주주로 2.7%의 지분을 갖고 있었다. 당시 국민연금이 양사의 합병에 찬성하자 다른 기관투자자도 이에 동조했고 합병의 걸림돌이었던 주식매수 청구권 행사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국민연금 관계자는 "당시 KT의 백기사를 자청한 것은 장기적으로 양사가 합병을 하는 게 주주가치를 높일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통합 삼성물산은 주주가치에 어떤 영향을 줄까. 대신경제연구소는 "양사가 통합하면 삼성그룹의 순환출자 해소가 가속화돼 지배구조 개선이 향후 주주권익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평가했다.

금융투자업계 전문가들은 합병 발표 이후 삼성물산 주가가 최근 3년간 최고치를 기록 중이고 합병이 무산되면 제일모직 주가 하락으로 손실을 볼 수 있기 때문에 국민연금이 삼성 편에 설 가능성이 높다고 예견한다.

반면 일부 투자전문가는 "국민연금이 의결권 자문을 받는 두개의 기관 중 서스틴베스트가 이미 이번 합병에 반대의견을 제출했고 나머지 하나인 한국기업지배구조원의 공식 의견은 아직 검토단계"라며 "주주가치 확보를 위해 국민연금이 합병이 무산되도록 의견을 개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삼성물산 /사진=머니투데이 홍봉진기자

◆먹튀? 엘리엇 투자성향도 찬반에 영향
국민연금이 예의주시하는 또 하나의 관점은 엘리엇의 투자 성향이다. 단순히 먹튀(먹고 튀다의 준말) 자본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기업가치를 제대로 평가한 공정한 투자자로 볼 것인지에 따라 국민연금의 판단은 180도 달라질 수 있다.

국민연금은 보유한 지분을 통해 우리나라 기업이 외국계 투자자들의 놀이터가 되지 않도록 방어하는 역할을 한다. 국내 기업의 지배구조는 주요 선진국에 비해 취약하다는 지적을 받아 온 상황. 따라서 종종 외국계 투자자들의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기도 한다. 이 경우 국민연금은 주주가치보다 경영권 회복에 더 힘을 보태왔다.

지난 2003년 발생한 SK그룹과 모나코 국적의 뉴질랜드계 자산운용사인 소버린 간 경영권 분쟁 사례가 대표적이다. 당시 SK그룹은 SK네트웍스의 분식 회계와 SK증권에 대한 부당 내부거래로 인해 최태원 회장이 검찰에 소환되는 등 악재가 터져 SK㈜를 포함한 계열사의 주식이 폭락했다.

이에 소버린은 폭락한 SK 주식을 매입, 14.99%의 지분을 확보해 막강한 2대 주주로서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최 회장 일가는 자사주를 매입하고 지분 확보에 나서며 방어에 주력했다. 이후 SK의 3.6% 지분을 가진 국민연금도 막판에 SK그룹을 지지하겠다고 밝히면서 경영권 방어에 결정적인 도움을 줬다.

KT&G도 비슷한 아픔을 겪었다. 지난 2006년 3월 헤지펀드 칼 아이칸은 KT&G 지분 6.59%를 매입해 주주 자격으로 인삼공사 기업공개(IPO)와 부동산 매각 등 비핵심 자산 매각을 요구했다. 이후 수차례 수난을 겪다 지분 3.1%를 보유한 국민연금의 도움으로 경영권을 확보했다.

엘리엇은 어떨까. 엘리엇은 소버린이나 칼 아이칸 등 먹튀 자본과는 조금 다르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국민연금이 고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엘리엇은 삼성물산 합병비율 가치가 턱없이 낮게 평가돼 소액주주들이 손해를 보고 있다고 주장한다.

상당수 소액주주도 이에 공감한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통합은 기업결합의 시너지 효과보다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지배력을 강화하려는 조치라는 게 재계의 분석이다. 엘리엇의 삼성물산 통합 반대 명분이 나름 뚜렷한 셈이다.

◆메르스 사태·여론 추이 '불안'

예상과 달리 국민연금이 누구의 손을 들어주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국민연금은 지난 3월 현대자동차그룹의 한국전력 부지 매입과 관련, 기업가치를 어느 정도 올릴지 또는 훼손할지 판단하기 어렵다고 보고 사내 이사 재선임안에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은 바 있다.

아울러 국민정서와 여론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삼성서울병원의 미흡한 '메르스' 환자 대응으로 국민여론이 싸늘한 상황이어서 국민연금이 여론 압박으로 삼성에 등을 돌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와 관련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관계자는 “통합삼성물산의 출범에 반대할지, 아니면 찬성할지 여부는 투자위원회에서 검토하고 분석하는 단계”라며 “아직은 판단하기 어려워 임시주총이 임박한 시점에 결정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389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