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67년 서울 종로5가에 ‘임성기 약국’이 문을 열었다. 그곳의 주인은 27세의 젊은 약사 임성기. 그는 중앙대학교 약대를 졸업한 직후 자신의 이름을 걸어 약국을 열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종로통에서 유명 인사가 됐다. 그가 직접 조제한 약은 말 그대로 ‘즉효’를 냈다. 환자들 사이에 입소문이 나면서 약국은 문전성시를 이뤘다.
#2. 6년 뒤. 조제약으로 유명세를 탄 그는 1973년 임성기제약을 설립했다. 같은 해 동료 약사들과 뜻을 모아 상호를 지금의 한미약품으로 변경하면서 재창업을 선언했다. 한미약품은 설립 초기부터 일선 약사들이 가장 선호하는 제약업체로 떠올랐다. 약국을 직접 운영해 본 그의 경험과 뛰어난 마케팅능력이 주효했다는 평이다. 일각에서는 ‘영업은 한미약품’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였다.
#3. 그로부터 42년이 흐른 지금, 한미약품과 임성기 회장은 한국 제약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 ‘신약으로 글로벌시장 진출’이라는 국내 제약업계의 오랜 숙원을 이룬 주인공이 된 것. 한미약품은 올해에만 7조6000억원 규모의 신약 기술을 수출하면서 명실공히 글로벌제약사 반열에 올랐다. 그 성장을 이끈 주역이 바로 임 회장이다.
약사 출신 글로벌제약사 총수. 임성기 한미약품 회장(75)이 연이은 수출 잭팟을 터뜨리며 ‘제약계 미다스 손’으로 주목받고 있다. “글로벌 신약 하나 만들어 내는 게 평생 꿈”이라던 그의 숙원이 이뤄진 것이다.
◆ R&D 고집… 당뇨 신약 ‘초대형 잭팟’
그에게 대박을 안겨준 제품은 당뇨 신약 ‘퀀텀 프로젝트’. 임 회장은 지난 5일 프랑스계 글로벌제약사 사노피아벤티스에 39억유로(약 4조9000억원) 상당의 퀀텀 프로젝트를 기술 수출하는 계약을 맺으며 제약업계를 놀라게 했다.
이어 나흘 만에 다시 들려온 희소식. 미국 얀센에 9억1500만달러(1조600억원) 규모의 당뇨비만 바이오신약 기술을 넘기는 수출계약을 성사시킨 것. 재계뿐 아니라 주식시장을 들썩이게 만든 대박행진이었다.
사실 임 회장이 한국 제약사에 길이 남을 금자탑을 세우기 시작한 것은 올 초부터다. 그는 지난 3월 글로벌제약사 일라이 릴리에 면역질환 치료제 ‘HM71224’를 8억9000만달러(약 1조300억원)에 수출한 데 이어 7월 항암제 후보물질(HM61713)의 기술을 베링거인겔하임에 7억3000만달러(8460억원)에 팔았다. 당장 받은 계약금만 7891억원. 이는 지난해 한미약품 연매출 5820억원을 훌쩍 뛰어넘는 액수다.
그 씨앗은 임 회장의 남다른 ‘신약 사랑’에서 비롯됐다는 평이다. 임 회장은 창업 초기부터 ‘약은 복제약이든, 합성신약이든 반드시 자체개발해 팔아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초기 한미약품을 키워낸 제품도 특허가 만료된 오리지널 의약품을 복제한 제네릭이었다. 임 회장의 경영철학은 약을 팔아 번 돈을 다시 약을 연구하고 개발하는 데 쓰는 형태로 되돌리는 것이었다.
지난 2000년 의약분업이 시작되면서부터는 연구개발(R&D)에 더욱 탄력이 붙었다. 임 회장 스스로 영업만 잘해서는 기업이 살아남을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렇게 지난 15년간 R&D에 쏟아 부은 비용만 9000억원. 특히 이중 5000억원은 최근 5년간 개량 신약을 개발하는 데 집중됐다. 이는 결국 기술 축적으로 이어져 한미약품이 ‘글로벌제약사’로 거듭나는 밑거름이 됐다. 제약업계는 임 회장의 고집스런 R&D 투자와 특유의 안목이 맞물려 한미약품이 대박 신화를 이뤘다고 평가한다.
◆ 편법증여 의혹 '곱지 않은 시선'
하지만 임 회장의 행보를 곱게 보는 시각만 있는 것이 아니다. 대규모 성과를 올린 것은 반길 만한 일이지만 편법 증여에 대한 의혹이 커지면서 1000억원대 꼬마 주식부자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싸늘하다.
재벌닷컴에 따르면 임 회장의 12세 손자가 보유한 한미약품 계열사 주식가치는 지난 6일 종가 기준 1095억6000만원. 상장사 주식 100억원 이상을 보유한 만 19세 이하(1995년 11월 6일 이후 출생자) 미성년자 주식부자 중 1위다. 나머지 7~11세인 친·외손주 6명도 각각 보유한 주식가치가 1069억2000만원에 달한다.
이들 7명의 주식가치 총합은 약 7510억원. 올해 초 611억원에 비하면 12.3배나 불어났다. 문제는 임 회장이 세금을 회피할 목적으로 손주들에게 주식을 넘겼다는 지적이 나온다는 점이다.
임 회장의 손주들은 지난 2011년을 전후해 증여나 무상 신주로 한미사이언스 등 계열사 주식을 받았다. 임 회장은 당시 만 4~9세인 손주들에게 각 25억원 규모의 주식을 증여했고 해마다 무상증자를 실시해 이들의 주식을 늘려줬다.
이를 두고 ‘우회적 탈세’라는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실제 조부모가 손주에게 주식을 물려주는 경우 대기업 오너들이 세금을 덜 내며 부를 세습하려는 불순한 의도로 악용돼 왔기 때문이다.
제약업계 관계자는 “임 회장의 성과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그의 손자들을 바라보는 세간의 정서는 박탈감과 위화감”이라며 “당시 내부정보를 통해 사전에 증여했다는 의혹이 나오기도 했는데 회사가 더 잘 나갈수록 이런 의혹을 깨끗이 불식시키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410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