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틀즈 멤버 폴 매카트니(왼쪽부터), 조지 해리슨, 존 레논, 링고 스타. /사진=이신화 작가

매튜 골목에서 만나는 비틀즈 첫 무대 캐번 1클럽

전히 ‘비틀즈’가 태어난 곳이라는 이유만으로 ‘리버풀’(liverpool)을 찾는다. 리버풀은 맨체스터(Manchester)를 거쳐 가게 된다. 영국 북서부의 맨체스터, 리버풀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익숙한 것은 축구 때문이다. 우리나라 유명 축구선수가 이 도시에서 선수로 뛰고 있다.
버풀 버스터미널은 한적했으나 기차역 주변은 복잡하다. 대로변 옆으로는 오래된 건축물들이 열지어 있다. 세인트 조지 홀(St. George’s Hall)을 비롯해 엠파이어 극장, 아트 갤러리, 도서관 등. 대부분 빅토리아 여왕(1819~1901년) 시절에 만들어진 휘황찬란한 건물들이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명성을 만들 정도로 당시 빅토리아 여왕은 영국에서는 위대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역사적인 시각으로 보면 무수한 나라를 식민지로 삼고 흑인들을 노예화시킨 여왕이다. 리버풀은 그 여왕과도 매우 밀접한 곳이다.

필자는 우선 ‘비틀즈’의 흔적부터 찾는다. 도심 곳곳에서 비틀즈를 찾아내는 일은 어렵지 않다. 존 레논의 이름을 딴 공항, 폴 매카트니가 살았던 집(20 Forthlin Road), 애비 로드와 스트로베리 필드 등 그들 노래에 영감을 준 장소들, ‘비틀즈 스토리’를 비롯한 여러 기념관들. 그중에서 여행자들이 ‘비틀즈 일번지’로 찾는 곳은 매튜거리(Mathew street)다. 매튜 골목에는 5~6개의 퍼브(pob)와 클럽이 뒤섞여 있다.

숨은 그림 찾듯이 비틀즈를 기념하는 조형물들을 찾아내면서 걷다 보면 골목 끝자락에 비스듬히 서 있는 존 레논 동상을 만난다. 비틀즈가 처음으로 무대에 섰다는 캐번 1 클럽(The Cavern Club) 앞이다. 비틀즈는 이 작은 바에서 근 2년간(1961년~63년) 292회 공연을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지금은 클럽이 두 곳으로 나뉘어져 있다. 분위기는 약간 다르다. 첫 번째 클럽이 클래식하다면 동굴 형태로 된 제 2클럽은 춤이 함께 어우러져 더 왁자하다.


먼저 비틀즈가 첫 무대에 올랐다는 캐번 1클럽의 지하 계단을 따라 내려간다. 온통 비틀즈의 흔적으로 장식한 인테리어. 작은 무대가 있고 한 켠에는 바텐과 초라한 의자들이 놓여 있다. 유행 지난 촌스러움, 칙칙함, 퀴퀘함이 함께 어우러진다. 대낮부터 찾아온 손님들은 가볍게 잔 술을 마신다. 신 맛과 정제되지 않은 맛을 내는 지역 생맥주는 마실수록 묘하게 매료된다. 아일랜드에서 왔다는 젊은 아가씨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는다. 어릴 적 비틀즈의 음악을 들었고 성인이 되어서야 이곳을 찾아온 그녀들은 환하게 웃음 짓는다.

어둑해지면 어김없이 통 키타를 두드리는 무명 가수의 라이브 무대가 펼쳐진다. 퇴색한 컨트리 가수 이야기를 다룬 영화, 크레이지 하트(Crazy Heart, 2009)의 주인공인 제프 브리지스(Jeff Bridges)를 닮은 무명 가수가 귀에 익숙한 팝송을 부른다. 렛잇비(Let It Be), 러브 미 두(Love Me Do), 이메진(Imagine) 등등. 가수는 힘겨운지 간간히 맥주로 목을 축이면서 노래를 불러 젖힌다. 흥에 겨운 손님들은 무대에 나가 음률에 맞춰 막춤을 추지만 필자는 차마 무대에 나갈 수 없다. 수줍음이 아니라 한국 문화에 길들여진 ‘틀’ 때문이다.

스탠드에 앉아 홀짝홀짝 지역 맥주만 들이킨다. 무대의 가수도 목이 마른지 자꾸만 바텐더에게 잔 맥주를 사 간다. 우리나라는 분명히 전속 가수에게 맥주를 공짜로 주겠지만 이 나라 무대 가수는 자기 돈으로 맥주를 사 마신다.

밖으로 나오니 클럽 앞에는 술 취한 사람들을 정리, 통제하는 지킴이들이 있다. 이곳 토박이라는 그에게 묻는다. 그는 분명히 리버풀 지역 사투리를 쓰고 있을 것이다.

“왜 입구를 지키고 있니?”
그는 ‘보안원’이란다. 클럽에서 만취하는 것은 절대 금기사항으로 ‘필자처럼 좋은 사람’(?)만 클럽을 이용할 수 있다고 내게 말한다. 취하면 클럽을 이용할 수 없고 클럽 내에서 취하면 이들에 의해 쫓겨난다.


“이 집은 누가 운영하니?”
“지금은 존 레논 시스터(sister)가 운영해”. 바로 밑에 있는 캐번 2 클럽도 같이 운영한단다.

리버풀 매튜거리. /사진=이신화 작가

리버풀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난 네 명의 청년이 만들어 낸 비틀즈
‘씨스터’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다. 필자가 아는 상식으로는 존 레논은 4살 때부터 이모가 친엄마인 줄 알고 살았다. 나중에 친엄마가 사고로 죽고 나서, 자신의 비화로 ‘mother’라는 명곡을 만들었다. Mother, you had me, but I never had you/I wanted you, you didn't want me/So I, I just got to tell you/Goodbye, goodbye.

비틀즈는 존 레논(John W. Lennon 1940~1980)이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존 레논은, 선창가 잡역부로 근무하던 아버지와 줄리아라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존 레논은 엄마라고 부를 수 없었던 친엄마의 노래 재능을 받은 듯하다. 당시 엘비스 프레슬리가 혜성같이 등장했고 존레논은 엘비스에게 큰 영향을 받는다. 그는 살아생전 ‘엘비스’가 없었다면 비틀즈도 없었다는 말을 하곤 했다.

그가 15살인 퀴리 뱅크 중학교 시절, 친구들과 함께 ‘쿼리 맨’(Quarryman)이란 스쿨 밴드를 조직해 그룹 활동을 한다. 이 밴드는 학교에서 열리는 콘서트나 파티 장소를 무대로 해서 연주를 했다. 1956년 6월, 울턴 교회에서 공연을 하다가 폴 메카트니(James Paul McCartney 1942~)를 만나 그때부터 함께 활동하게 된다. 이어 폴의 친구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 1943~2001)이 합류한다. 그렇게 시작된 밴드는 여러 번 우여곡절을 겪어 해체될 뻔도 하지만 1961년 11월에 브라이언 엡스타인(Brian Epstine)이 매니저로 들어오면서부터 활기를 찾는다. 이들은 EMI 레코드사의 거물 프로듀서 조지 마틴(George Martin)의 도움으로 레코딩 할 기회를 얻는다. 이 때 링고 스타(Ringo Starr 본명 Richard Starkey 1940~)가 들어와 비틀즈(Beatles)란 이름으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링고스타는 당시 15살이었다.

무수한 사연과 이야기를 남긴 비틀즈 멤버 네 사람의 삶을 일일이 조명할 수는 없다. 차라리 비틀즈에 대해 조금 더 가깝게 접근하고 싶다면 존 레논의 삶을 잘 조명해주는 ‘비긴즈-노웨어 보이’(Begins-Nowhere boy, 2009)라는 영화를 보면 그의 전체 삶을 조명할 수 있을 것이다. 또는 영화 Across The Universe(2007년 작)도 좋다. 13명의 배우들이 영화 스토리에 걸맞게 비틀즈 음악을 잘 매치시켜 놓았다. 이 영화는 우리나라 여배우의 전 애인으로도 알려진 짐 스터게스의 첫 주연 출연 작품이기도 하다.

리버풀에서 그들의 흔적을 더 보고 싶다면 바닷가 근처에 있는 ‘비틀즈 스토리’를 찾으면 된다. 애비로드 스튜디오와 케번클럽, 스타클럽 등의 명소들을 재현해 놓았다. 또 비틀즈가 출연했던 뮤직비디오 등의 영상자료를 볼 수 있다. 비틀즈의 오리지널 무대 의상과 존 레넌이 연주했던 피아노, 그들이 출연했던 영화 등 다채로운 볼거리가 준비돼 있다.

그런데 기억해야 할 것은 이들이 악보를 볼 수도, 쓸 수도 없는 문맹이었다는 점이다. 거기에 몸과 마음이 다듬어지지 않은 10대들이 세기의 뮤지션이 될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오늘날 신화 같은 존재가 됐다. 단순히 ‘운’이 좋았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들은 지금도 리버풀을 늘 빛내고 있다. ‘리버풀의 비틀즈’가 아니라, ‘비틀즈의 리버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도시 곳곳에는 이 전설적인 밴드의 흔적들이 새겨져 있다.

2015년 5월, 74세의 노장 폴 메카트니는 내한공연을 했다. 필자는 비록 공연은 보지 못했지만 그의 전설 같던 무대에 대해서는 귀가 쟁쟁하도록 들었다. 이구동성으로 ‘환타스틱’을 외쳐댔단다. 사운드 시티(Sound City, 2013)라는 다큐영화에는 폴 메카트니가 출연해 녹음하는 장면이 나온다. 비틀즈라는 그룹은 오래전에 흩어졌지만 아직 한 명의 뮤지션이 남아 전설을 이어가고 있음에 고마울 따름이다.

리버풀 부두. /사진=이신화 작가

해양 무역도시의 옛 잔상들, 노예 거래
리버풀은 바닷가가 있는 항구 도시다. 오래전부터 해양 무역 도시였고 20세기 초, ‘대영제국 제2의 수도’로 불렸다. 그러다 제1·2차 세계대전으로 파괴됐다. 특히 리버풀은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영국 내 다른 도시보다 심한 폭격을 받았으나 전쟁 이후 재건 사업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그래서 항구 주변은 현대적인 건물이 대부분이다. 그중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알버트 독(Albert Dock)이 있다. 이 건물에는 머시사이드 해양 박물관(Merseyside Maritime Museum), 국제 노예박물관(International Slavery Museum), 테이트 리버풀(Tate Liverpool) 등의 명소들이 자리 잡고 있다.

국제 노예박물관이 관심을 끈다. 흑인을 사람 취급하지 않았던 오래전, 이 항구에는 가나, 자메이카 인들의 무수한 노예 거래가 이뤄졌었다. 빅토리아 여왕 시절이다. 국제노예박물관을 둘러보면, 죄의식조차 없던 그 시절 영국민들의 잔인함이 떠오른다.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역사의 흔적들은 가슴을 답답하게 만든다. 영국은 1807년 노예 무역을 폐지했다. 그와 관련된, 많은 영화, 다큐들이 있지만 최신작이면서 실화를 바탕으로 한 노예 12년(12 Years a Slave, 2013)을 보면 그때의 잔인성과 몰인간적인 영국 귀족들을 만날 수 있다.

특히 이 영화에 출연한 베네딕트 컴버배치(Benedict Cum berbatch)라는 배우의 출연 계기가 독특하다. ‘컴버배치’라는 성씨는 카리브 해 섬나라에서 노예를 부렸던 조상의 흔적이다. 당시 바베이도스에서 사탕수수 농장을 운영하며 노예 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에이브러햄 컴버배치(1726~1785년)가 그의 조상이다. 베네딕트의 어머니인 여배우 완다 벤담은 노예제 보상 피소를 우려해 본명으로 배우활동을 하지 말라고 권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속죄하는 의미를 담아 이 영화에 적극 출연했다. ‘노예 12년’에서는 선량한 백인 윌리엄 포드로 분했다.

또 영화로 익숙한 타이타닉 호도 리버풀과 무관치 않다. 타이타닉 호는 영국 사우스햄튼(1912년 4월10일)에서 출발해 뉴욕으로 항해하다 빙산에 부딪혀 침몰한 초대형 여객선. 대서양 횡단여행의 시대를 개척하기 위해 건조된 이 배의 공식항구는 리버풀이었고, 승무원과 승객의 상당수도 리버풀 사람들이었다. 타이타닉호의 탄생과 침몰 및 각종 배의 모형을 전시한 곳이 해양박물관이다.

필자는 리버풀에 머무는 내내 캐번 바를 찾았고 마지막 날에는 리버풀 대성당(Liverpool Cathedral)의 첨 탑 위에 올랐다. 위에서 바라본 도심규모가 생각보다 컸지만 성냥갑처럼 작아 보이는 리버풀 건물들을 내려다 보면서 상념에 젖었다. 그곳에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만들어지고 있을까? 리버풀을 언제 다시 올 수 있을까? 그날 해안으로 칙칙하게 넘어가는 낙조는 참으로 쓸쓸했다.

☞ 본 기사는 <하이하이>(http://hi.moneyweek.co.kr) 제4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