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책연구기관인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의 ‘2015 통신시장 경쟁상황 평가’ 보고서를 놓고 뒷말이 무성하다. 예년보다 발표시기가 한달가량 늦은 데다 민감한 부분은 결론을 유보해서다. 방송·통신업계의 뜨거운 감자인 SK텔레콤의 CJ헬로비전 인수합병(M&A) 인허가 여부를 놓고 이해당사자 간 격렬한 논쟁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KISDI 보고서가 혼란을 수습하지는 못할 망정 오히려 부추기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 2월26일 SK텔레콤과의 통합을 논의하기 위해 열린 CJ헬로비전 임시주주 총회. 안건은 참석 주주 97.15%의 찬성으로 가결됐다. /사진=뉴시스 DB
◆혼란 부추기는 국책기관 보고서
지난해 11월 이동통신 1위 사업자 SK텔레콤이 전국 케이블TV 점유율 1위이면서 동시에 알뜰폰 점유율도 1위인 CJ헬로비전을 인수하겠다고 발표한 이후 5개월째 이통 3사 간 극한 갈등이 지속되고 있다. SK텔레콤의 이통시장에서의 절대적 지배력이 케이블방송과 결합시장으로 전이될 것을 우려한 KT와 LG유플러스가 손을 잡고 ‘결사반대’를 외치기 때문이다. KT·LG유플러스 연합군이 M&A를 막아야 하는 이유를 제시하면 SK텔레콤이 해명에 나서는 일이 도돌이표처럼 반복되고 있다.
이 가운데 KISDI가 3월18일 ‘2015 통신시장 경쟁상황평가’ 보고서를 홈페이지에 기습 게시했다. KISDI는 미래창조과학부의 위탁을 받아 매년 통신시장 경쟁상황평가를 실시한 뒤 11월 말 발행, 검토기간을 거쳐 이듬해 2월 공개해왔다.
이 보고서는 정부의 통신 관련 정책 마련에 근거자료로 활용되기 때문에 발표 때마다 업계의 관심을 받았다. 특히 이번에는 SK텔레콤-CJ헬로비전 M&A 논란이 방송·통신업계의 핫이슈로 떠올라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이에 따라 예년보다 한달가량 늦은 지연 발표를 두고 KISDI가 통신업계 눈치를 살피며 차일피일 발표를 미루다 여론의 질타에 떠밀려 뒤늦게 발표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게다가 민감한 부분은 비켜간 내용을 놓고도 뒷말이 나왔다. 이번 M&A의 핵심 쟁점인 결합상품 서비스시장에 대한 평가에서 이통시장 지배력 전이를 놓고 어정쩡한 결론을 냈기 때문이다. 601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내용을 담은 이번 보고서는 “1999년 이후 정보통신정책연구원이 수행한 경쟁상황평가 연구를 개선해 보다 객관적이고 심층적인 평가를 실시했다”는 김도환 KISDI 원장의 평가가 무색하게 민감한 부분의 결론은 유보했다.
논란이 된 부분은 SK텔레콤의 이통시장 점유율(49.9%)보다 이동전화 포함 결합상품 가입자 점유율이 51.1%로 1.2%포인트 증가했다는 대목이다.
이에 대해 KISDI는 “이통시장의 지배적사업자인 SK텔레콤의 이동전화 결합상품이 여타시장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선 상반된 시각이 존재하며 이의 판단을 위해선 관련 시계열자료의 충분한 축적과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며 “현재까지 결합 소비는 역동적으로 변화하므로 특정한 트렌드를 중심으로 시장을 획정하고 특정하기 어려운 상태”라고 분석했다.
이는 유선전화시장의 지배적사업자인 KT의 유선전화 결합상품에 대해 “관련시장의 추이 등을 고려할 때 여타시장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과 대조적이다.
◆정부, 통신업계 극한 갈등 ‘방치’
당초 통신업계에서는 KISDI의 보고서 중 결합상품시장 분석이 SK텔레콤-CJ헬로비전 M&A 인허가 심사의 핵심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KISDI가 애매한 보고서를 내놓으며 가뜩이나 극심하던 업계의 갈등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됐다.
보고서 발표 직후 KT·LG유플러스 측은 “SK군의 2014년 이동통신 포함 결합상품 시장점유율이 51.1%로 이통시장 점유율(49.9%)보다 높게 나타난 것은 시장지배력 전이를 명확하게 입증하는 것”이라며 “이번 M&A가 산업에 미치는 영향과 소비자 피해에 대해 다각적이고 종합적인 분석이 선행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SK텔레콤은 “(보고서를 보면) 이동전화 가입자 수 기준 점유율이 2004년 51.3%에서 2015년 45.2%로, 같은 기간 이동전화 매출액 기준 점유율은 59.7%에서 49.6%로 떨어졌다”며 “이는 지배력 전이가 발생할 경우에는 나타날 수 없는 현상이며 시장 경쟁이 활성화되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반박했다.
결국 KISDI가 모호한 결론을 내리며 이해당사자들이 아전인수식 해석으로 날선 공방전을 벌일 빌미를 마련해준 셈이다.
통신업계 한 관계자는 “KISDI가 예년보다 발표를 지연시킨 데다 보고서에 논란의 여지를 남겨 갈등을 부추긴 측면이 있다”며 “갈등을 종식시켜야 할 국책연구기관이 제역할을 못한다”고 꼬집었다.
일각에선 이번 M&A 허가의 키를 쥔 미래창조과학부, 방송통신위원회, 공정거래위원회도 KISDI와 마찬가지로 책임을 방기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SK텔레콤은 지난해 12월1일 M&A 인허가 신청서를 접수했다. 하지만 정부기관의 심사가 장기화되면서 일부 기관은 법령상 심사기한을 이미 넘겼다.
미래부는 전기통신사업법상 기간통신사업자 인수합병 심사기한인 60일을 이미 넘겼다. 심사 기한을 산정할 때는 자료 보정 기간과 공휴일을 제외하는데 이점을 감안해도 3월9일로 심사기한이 지났다.
다른 기관들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다. 미래부는 방통위의 사전 동의 및 공정위와의 협의를 거쳐 최종 결정을 내린다. 그런데 방통위는 3월22일 전체회의를 열고 이번 M&A 심사를 더 깐깐하게 하기로 결정했고 공정위는 4월 초쯤 기업결합 심사보고서를 마무리하고 관련 사업자들에게 보낼 것으로 알려졌다.
공정위가 각 사업자의 해명을 들은 후 최종안을 마련해 미래부와 협의를 진행해야 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결과 발표시기는 빨라도 5월 이후가 될 것으로 보인다. SK텔레콤과 CJ헬로비전이 합병 기일로 잡은 4월1일은 사실상 물건너간 셈이다.
업계 관계자는 “통신업체 간 치열한 다툼이 장기화되는 상황에서 중재를 해야 할 정부기관들이 시간만 끌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업계의 갈등을 방치하고 있다”며 “미래부가 뒤늦게 제시한 심사 가이드라인도 특별한 내용이 없어 당분간 갈등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429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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