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틈바구니 속 공조와 보복 사이 '저울질'
미국 대 중국. 세계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G2 국가 간 철강·반도체 전쟁에 국내 관련 업계가 울상이다. 한쪽 편을 들면 다른 쪽의 보복이 뻔히 예상되는 상황에서 선택을 요구받고 있어서다. 미국 업계의 지속적 공조 요구에 이어 최근에는 미국정부 고위관계자도 같은 제안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더 이상 미루기 힘든 선택의 시간이 다가오는 셈이다. ‘고래 싸움에 끼인 새우’의 딜레마에 빠진 형국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미국, 중국의 시장 교란 '제동'
반도체업계에 따르면 지난달 방한한 마커스 자도트 미국 상무부 차관보는 방한기간 우리 정부와 삼성전자, SK하이닉스의 고위관계자를 만나 중국의 국가 주도 반도체산업 지원에 대한 제재 조치에 공조해 달라는 제안을 했다.
미국반도체산업협회(SIA)가 지난해부터 한국반도체산업협회(KSIA)에 여러 차례에 걸쳐 중국의 ‘반도체 굴기’ 제재에 동참할 것을 요청한데 이어 정부까지 나서 같은 취지의 요구를 한 셈이다.
앞서 미국 측은 지난해와 올해 초에 걸쳐 중국 칭화유니의 마이크론테크놀로지 인수와 웨스턴디지털 지분 인수를 불허했으며, 세계무역기구(WTO)를 통해 중국 ‘반도체 펀드’가 WTO에서 금지하는 국가 보조금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따지기도 했다.
반도체 펀드는 2013년 중국의 반도체부문 수입이 90%를 넘어서며 원유를 제치고 최대 수입품으로 등극하자 자생력을 확보하기 위해 이듬해 국무원의 ‘국가 반도체산업 발전 추진 요강’에 따라 출범시킨 펀드다. 지난해 말까지 중국정부와 국영기업, 은행 등 16개 기관이 이 펀드에 220억달러를 출자했는데 2020년까지 560억달러를 모은다는 계획이다.
이 중 4분의1가량을 중국정부가 출자했다. 투입된 자금은 중국 반도체 후공정(패키징)전문업체 JCET가 세계 4위 반도체 패키징업체인 싱가포르 스태츠칩팩을 인수하거나 중국 1위 시스템반도체업체 SMIC가 공장을 최신설비로 증설할 때 등 자국의 반도체산업 육성을 위해 활용된 것으로 알려진다.
이런 가운데 중국정부도 애플 등 미국기업이 중국시장에 판매하는 제품에 대한 보안 확인 검사를 강화하는 등 반격에 나섰다. 미국의 공세가 계속될 경우 중국의 보복 조치는 더 단호하고 광범위하게 이뤄질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이와 관련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우리 정부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대책 마련에 나섰지만 아직까지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상태다. 지난달 26일 서울 워커힐호텔에서 열린 세계반도체협의회(WSC) 총회에서도 국내 업계 고위관계자들은 애매한 태도로 일관했다.
이 자리에서 박성욱 KSIA 회장(SK하이닉스 사장)은 중국의 반도체 보조금 지원에 대한 입장을 묻는 취재진의 질의에 “투명하고 비차별적으로 이뤄지길 바란다”고만 답했다. 전영현 삼성전자 사장(DS부문 메모리사업부장)은 “의견을 전달할 분이 참석하지 않았다”며 답을 피했다.
국내업계 입장에선 1차적 관점에서 볼 때 미국의 제재 조치에 동참하는 게 유리하다. 디스플레이에 이어 2014년을 기점으로 반도체부문에서도 중국의 굴기가 시작된 상황에서 제동을 걸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체 반도체 수출액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최대 수출국인 중국이 대대적 보복에 나설 경우 엄청난 피해가 불가피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미국 SIA는 정부 간 협의체 연례회의가 열리는 10월 WSC 총회에서 중국의 반도체 펀드 문제를 의제로 해서 집중적으로 논의한다는 방침이지만 양측의 의견 조율이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오히려 양국이 철강 등 다른 분야로 전선을 확대하고 있어 입장 차이만 확인하는 자리가 될 수도 있다는 관측이 많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중국 무역의존도가 높은 한국정부나 반도체업계에서는 최대 우방국인 미국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따르기에는 중국의 보복이 너무도 뻔해 쉽사리 결론을 내릴 수가 없다”고 말했다.
◆전선 확대… 중국, WTO 제소 맞불
철강분야는 상황이 더 심각하다. 미국 상무부는 지난달 17일 중국산 냉연강판과 철강제품에 최고 451~522%의 관세(반덤핑세 포함)를 부과키로 했다. 또 미국 무역위원회(ITC)는 지난 1일 중국의 철강기업 40개곳이 해킹으로 미국 철강회사 US스틸의 영업 비밀을 훔치고 제품 가격을 조작했다는 의혹과 관련해 공식 조사를 결정했다. ITC의 최종 판단이 나오기까지는 1년가량 걸릴 전망이지만 사실상 중국산 철강제품에 대한 수입봉쇄 조치에 나선 셈이다.
이에 맞서 중국도 WTO에 제소한다는 방침이다. 중국 상무부는 지난달 말 성명을 통해 “미국의 언행은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지적과 대응”이라며 “중국기업의 적극적 대응 독려와 함께 WTO 관련 규정에 따라 중국 철강기업의 정당한 권익이 보호받도록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자국 철강산업 보호를 위해 미국 측의 입장을 지지하는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달 27일 폐막한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선 미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중국발 철강 과잉생산 문제를 해소해야 한다는 내용의 공동선언문을 내놓았다. 나아가 일본은 G7 정상선언과 미국 등의 방침에 적극적으로 동참, 중국의 철강덤핑 수출에 강력히 대처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국내 철강업계도 대책 마련에 분주하다. 포스코, 현대제철, 동국제강 실무자들은 최근 비상회의를 열고 미국의 대중국 무역공세에 대한 대책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자리에선 중국의 과잉물량 한국시장 밀어 넣기 등 예상 시나리오에 따른 대비책과 수급불안을 막기 위한 안건 등이 다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철강업계 한 관계자는 “중국의 과잉, 저가 공급을 막기 위해 미국이 주도하는 동맹국들이 함께 움직이는 상황에서 우리도 정부와 공조해 중국의 보복을 최소화하면서 자국 산업도 보호할 수 있는 대책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439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