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층건물이 즐비한 서울 종로구 청진동 일대, 초현대식 건물 사이사이 서울 600년의 역사가 숨어있다. 화려한 식당과 카페에 시선을 빼앗겨 무심코 지나가는 길목이지만 지하철 광화문역과 종각역을 잇는 청진구역은 이전복원된 유적이 전시된 ‘살아있는 박물관’으로 불린다.
과거 유적의 일부만 복원하는 시늉에 그쳤던 개발방식이 서울시를 중심으로 유적 모두를 보존·복원하는 방향으로 변했다. 도시개발 때문에 수백년간 땅 속에 묻혀있던 유적이 파괴되는 일이 더 이상 반복돼선 안된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덕분이다. 바쁜 일상에서 걸음을 한 템포 늦춰 도심 속 숨은 문화재를 만나보자.
청진지구 ‘타워8’. /사진제공=서울시
◆서울 광화문-종로 일대, 축적된 역사 ‘생생’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도시 서울. 한국을 찾는 외국인들은 초고층빌딩 숲 사이 고즈넉한 경복궁의 아름다움에 매료된다고 한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서울이 전부가 아니다. 서울 곳곳에는 2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축적된 역사의 흔적이 묻혀있다.
특히 광화문-종로 일대는 조선시대 시장이 있던 거리로 도처에 백성들의 희로애락이 남아있다. 조선 백성들의 생활사는 지난 2003년 주상복합건물사업을 시행하기 위해 기존의 건물을 철거하던 중 발견됐다. 청자와 백자편, 목조건물터와 기와조각 등 다양한 유물이 발견된 것이다.
발굴현장을 지켜보던 이들의 이목을 사로잡은 것은 다수의 유물뿐만이 아니다. 조선의 건국부터 현대까지 총 6층으로 나눠진 문화층은 경이로울 정도였다. 1문화층부터 3문화층은 현대부터 개항 이전까지, 4문화층부터 6문화층은 17세기부터 조선 건국의 시기를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당시 시장의 건물터와 건물의 나무기둥, 주춧돌, 배수시설 등이 남아 건물의 배치를 알 수 있었고 불에 탄 나무의 잔재도 남아있었다.
(위부터)청진지구 ‘그랑서울’, ‘포시즌호텔’. /사진제공=서울시
이에 따르면 최근 광화문 핫플레이스인 ‘D타워’는 15~17세기 식수를 구하려는 서울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던 핫한 장소로 추정된다. D타워의 전면과 후면, 중앙 통로에는 15~17세기 건물지 3기와 우물지 1기가 보존됐고 당시 토층의 색깔, 흙의 굵기 등을 보존해놓은 토층 2기도 중앙통로에 전시됐다.
D타워 뒤쪽에 위치한 KT 사옥 역시 내외부에 건물지 4기와 토층 2기가 존치됐다. KT 사옥 내부에는 청진1지구 복원모형이 전시됐으며 그 옆에 위치한 라이나생명 사옥에도 건물지 3기와 토층 2기가 보존됐는데 사옥 내에 전시실이 마련돼 좀 더 가까이 ‘지하에 묻힌 600년’을 관람할 수 있다. 해당 전시실에는 분청사기, 장신구 및 생활관련 유물이 보존됐다.
‘타워8’과 ‘그랑서울’ 사이에는 역사의 흔적이 더욱 짙게 남아있다. 조선시대의 우물이 복원돼 생생한 유적을 만날 수 있으며 복원된 우물의 원래 위치도 표시됐다. 청진구역의 끝에 위치한 그랑서울 건물 한켠에는 석축과 초석이 전시됐고 건물지와 토층, 복제 유물 등이 시민을 반긴다.
김해시 ‘유적공원’ /사진제공=김해시
◆대전·김해, 유적지가 도심공원으로
서울의 청진지구처럼 건물의 내외부에 공존하는 방식도 있지만 이전복원 후 유적공원으로 조성되는 사례도 있다.
대전의 둔산선사유적지가 대표적이다.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28호인 둔산선사유적지는 1991년 둔산지구 개발사업 당시 대량의 유적이 발견돼 선사시대 대전에 마을이 형성됐다는 단서를 제공했다. 당시 청동기시대 집터 3기와 신석기시대의 움집자리, 용도를 알 수 없는 구덩이와 빗살무늬토기 조각 등의 유물이 발견됐고 구석기시대의 석기 50여점도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둔산선사유적지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한 장소에서 구석기·신석기·청동기시대의 유물이 모두 발견됐다는 역사적 의의를 가진다. 대전광역시는 이를 이전복원하고 선사유적공원으로 조성해 해당 지역 부근의 괴정동 청동기유적, 석장리 구석기유적 등과 함께 선사문화의 중요한 지표로 삼고 있다.
김해 장유지구 유적공원도 유적을 보존하고 도시공원으로 활용한 모범사례다. 김해시 장유면 일대의 택지개발지구인 장유지구는 공사 전 시행한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6~7세기 가야의 굴립주 건물지 24기, 돌로 쌓아 만든 벽체를 가진 대형특수건물지 1기, 건물지와 기둥구멍 480여기, 소형구덩이 유구 5기, 우물·도로·배수로 각 1개소, 옹관묘 2기 등의 유구와 토기, 철기, 토제품, 여러가지 목재품 등 많은 문화유산이 발견됐다.
이에 한국토지주택공사는 유적들 중 상태가 좋은 고상건물 5동, 반 수혈건물 약 1동, 우물 1개소 등을 이전복원하기로 결정하고 이전복원된 유구를 중심으로 유적공원을 조성했다. 특히 고대의 지상식건물인 고상건물을 고증을 통해 복원, 시민들이 휴식하고 배울 수 있는 장소로 만들었다.
◆사업자에 보상 없어 발굴 중 훼손되기도
개발이 진행되다 문화재가 훼손되는 경우는 없을까. 문화재청에 따르면 지난 2012년 5월 울산시 울주군 두동면 일원 단독주택부지에서 조사 없이 무단으로 개발해 문화재를 훼손한 관련자에게 법적 조치가 내려졌다. 이 사례 외에도 다양한 지역에서 문화재 훼손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훼손 사례가 드러나면 문화재청은 관련전문가의 현지조사 등으로 훼손 여부 및 경위 등을 파악하고 해당 단계에서의 문화재 보존방안을 검토한다.
문화재청 측은 “중요한 유적이 확인되면 전문가검토회의를 거쳐 조사기관의 의견을 듣고 보존의 성격을 논의한다”며 “사례에 따라 사업이 중단되는 경우도 있고 허용할 수 있는 만큼 개발을 허용하거나 보존 조치하는 경우가 있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문화재 발굴 관련 한 관계자는 “문화재 보존은 개인 재산권과 관련돼 이해관계가 상충한다”며 “문화재가 발견되면 사업자는 개발을 멈춰야 하는데 이에 대한 국가 차원의 보상제도가 없다. 사업자가 비용을 전부 부담해야 해 불법개발이 진행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지난해부터 역사 유적을 보존하는 새로운 사업방식이 본격적으로 논의됐다. 문화재 보존과 개발을 적절히 보완하는 해결책이 나온 것. 서울시는 종로구 공평구역에서 신축빌딩의 용적률, 건폐율을 올려주는 대신 사상 최초로 역사 유적을 전면 보존하기로 했다. 현재 공사가 진행 중인 공평 유구전시관이 역사적 가치를 살리면서 사업자의 만족도까지 끌어올릴지 주목된다.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은 “청진지구는 초고층 건물과 유적의 적절한 조화를 목표로 했지만 아쉬운 점이 남는 사례기도 하다”며 “도심 속 유적이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문화재 설명 등이 함께 준비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 본 기사는 <머니S>(www.moneys.news) 추석합본호(제452호·제453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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