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연근무제/사진=이미지투데이
#. 워킹맘 박과장은 오전 10시 은행에 출근한다. 출근을 늦춘 덕에 등교하는 아이들을 챙겨주고 전쟁터 같던 출근 길도 한결 여유로워졌다. 오후 7시, 퇴근이 한시간 늦어졌지만 밤 늦게 학원에 다녀오는 아이들의 저녁을 차려줄 수 있어 마음을 졸이지 않아도 된다.
#. 김대리는 은행 지점이 아닌 집에서 가까운 스마트워킹센터에 출근한다. 편한 옷을 입고 스마트워킹센터에서 일하는 자율출퇴근제를 신청한 후 일에 대한 의욕도 생겼고 능률도 올라 만족스럽다.
은행들이 유연근무제를 본격 시행하면서 달라진 풍경이다. 유연근무제는 개인의 사정에 맞게 자율적으로 출·퇴근 시간을 조정하는 시간선택제와 재택근무 등을 말한다. 신한은행이 지난해 7월 '스마트근무제'를 도입했고 다른 시중은행들도 유연근무제에 동참하고 있다.
지난 2일 우리은행은 우리카드·우리종합금융·우리금융경영연구소·우리신용정보·우리펀드서비스·우리프라이빗에퀴티자산운용 등 전 계열사에 유연근무제를 도입했다. 오전 8시30분, 9시30분, 10시30분 중 선택해 9시간(점심식사 1시간 포함) 동안 근무하면 되는 식이다.
직원들이 내부 인트라넷에 접속해 신청서를 작성, 등록하면 소속 부서장이 승인한다. 매월 말 자신의 출근시간을 최소 한달에서 최대 6개월치까지 미리 정해 신청할 수 있다.
IBK기업은행은 지난 3월부터 본점 직원 2900여명을 대상으로 '시차출퇴근제'를 운영 중이다. 직원들은 오전 7시30분부터 오전 10시 사이에 30분 간격으로 출근시간을 정해 8시간을 근무한다.
IBK기업은행은 지난해 10월부터 지난 1월말까지 4개월 동안 본점 직원 30여명을 대상으로 제도를 운영해 직원들의 좋은 반응을 이끌어냈고 시차출퇴근제를 확대 운영키로 했다.
앞으로도 은행권의 유연근무제 도입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KEB하나은행은 오는 7월 서울 소재 을지로 신사옥에 입주하면서 좌석 지정제를 폐지하고 출근하는 순서대로 좌석에 앉아 근무하는 '스마트오피스' 제도를 도입할 계획이다. KEB하나은행 노사는 인사제도 통합 TF(태스크포스)팀를 구성하고 유연근무제를 논의 중이다.
은행 관계자는 "고객 90% 이상이 비대면 거래를 이용하고 있어 모든 직원이 창구에 앉아 고객을 맞는 고정근무제가 필수적이지 않게 됐다"며 "기존 근무를 개선한 시간선택제와 재택근무 등 유연근무제가 확대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속성 중요… 실효성도 의문
은행권에 불고 있는 유연근무제 바람은 이미 선진국에선 보편화된 근무방식이다. 직원들은 일과 가정 양립에 도움이 돼 만족도가 높고 기업은 인건비 등 부담을 줄이는 효과를 낼 수 있어서다.
대한상공회의소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시간선택제를 도입한 국내 기업은 11%대인 반면 유럽과 미국 기업의 도입비율은 각각 69%, 36%로 집계됐다. 근로자가 출퇴근 시간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시차출퇴근제 역시 국내 도입비율이 12.7%인 반면 미국 81.0%, 유럽 66.0%로 높다.
문제는 유연근무제를 지속할 수 있는 근무환경이다. 우리나라처럼 경쟁의식이 팽배한 기업문화에선 직원들이 자율적으로 출퇴근 시간을 정하는 유연근무제가 지속되기 어렵다는 전망이 나온다.
실제로 일찍 출근하고도 퇴근시간이 늦어지는 등 부작용이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다. 또 실적이 미미한 점포에선 직원들이 유연근무를 신청하기 어려워 일부 직원만 혜택을 받는 역차별 우려도 제기된다.
현재 시중은행들은 지점을 지역단위 파트너십그룹(PG)으로 관리하고 있다. 유연근무제가 은행에 자리잡기 위해선 각 지역의 최소 1개 지점이 유연근무제에 참여해야 한다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지점 간 영업실적을 기반으로 점수를 매겨 직원들의 KPI(성과평가지표)를 반영하는 만큼 상대적으로 실적이 낮은 지점 직원들은 유연근무제를 신청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KB국민은행은 지난해 말 유연근무제를 시범운영했으나 일부 직원들의 불만으로 유연근무제를 확대 시행하지 못하고 있다. KB국민은행 노조는 유연근무제 실시 지점 근무자 475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유연근무제 도입 취지에 공감하지 않는다'는 직원이 응답자(218명)의 57.8%로 공감한다는 직원(37.6%)보다 많았다고 주장한다.
유연근무제를 적용한 직원 중에선 '근무시간을 준수했나'라는 질문에 72%가 '그렇지 않다'고 응답했고 76.1%는 '유연근무제 희망자 선택의 자율성이 보장되지 않는다'고 답했다.
KB국민은행 노조 관계자는 “늦게 출근하기로 했으나 오전에 회의가 열리거나 일찍 출근해도 늦게까지 처리해야 할 업무가 쌓이는 등 유연근무제 효과를 보기 어려운 업무환경”이라며 “유연근무제는 어떤 경우에도 직원 만족이 우선이기 때문에 시기를 늦췄으면 좋겠다는 입장을 전달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KB국민은행 관계자는 “현재 시범운영 기간이라 유연근무제를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는 일이 생겼을 수 있다”며 “제도가 정착되면 신청자와 고정근무자를 확실히 구분해 유연근무제를 운영하도록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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