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2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율곡로의 현대건설 본사 앞. 작업복을 입은 근로자 10여명이 몰려와 확성기를 들고 “밀린 임금을 책임지라”며 고함쳤다. 근로자 대표는 자신을 경기도 광주에 있는 힐스테이트태전 아파트 건설현장의 인부라고 소개하며 일주일째 농성 중이라고 설명했다. 형틀목수 기술자인 그는 “공사를 다 마치고도 두달치 급여를 못받았다. 800만원을 받아야 하는 사람도 있고 전부 다 합하면 200명이 넘는다”고 말했다. 시공사인 현대건설 측은 공사비를 정상적으로 지급했지만 하도급업체 누리비엔씨가 지난 4월 자금난으로 도산하면서 말단 하청직원들이 임금을 떼인 것으로 확인됐다.

경기도 광주 힐스테이트태전 건설현장. /사진=머니투데이 배규민 기자

◆지역건설사 도산에 파장 일파만파
현대건설은 법적으로 공사비와 임금을 이중지급할 책임이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현장근로자들은 “대기업 원청업체인 현대건설이 공사비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데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번 사건이 심각한 이유는 누리비엔씨와 같은 지역건설사 한곳이 도산하면서 하도급거래를 맺은 현장의 여러 자재·장비업체, 일용직·현장식당까지 한꺼번에 피해를 입어서다.

누리비엔씨는 충남 대전지역의 1위 전문건설업체다. 이번 부도로 대전 관저4지구 관저더샵 현장도 공사 차질이 불가피하다. 시공사인 포스코건설은 누리비엔씨에 공사비를 지급했지만 올 초 임금체불이 시작됐다.
현대건설의 경우 경남 창원감계 힐스테이트2차 현장에서도 똑같은 문제가 발생했다. 오는 10월 입주를 앞두고 근로자 200명이 임금을 못받은 것. 하도급업체 대청공영이 도산하면서 임금이 체불됐다.


경기도 부천에서 안산을 잇는 소사-원시 복선전철 현장 역시 중간 하도급업체 정암이앤씨와 대남토건이 지난해 3월과 올 4월 잇따라 도산하며 근로자들이 임금을 떼였다. 두 하도급업체를 선정한 현대건설과 대우건설은 지금까지 체불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상황이다.

◆하도급 직불·관리책임 논란

소사-원시 현장은 코레일(한국철도공사)이 운영하는 공공공사임에도 관리실태가 허술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번 공사를 진행한 자재업체 관계자는 “하도급계약서나 근로계약서가 없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하도급 직불규정을 위반하는 경우도 많다”며 “정부에서 발주한 공사마저 이렇게 제멋대로 운영되는 것이 공사장의 현실”이라고 말했다.


중간 하도급업체가 도산하기 전 원청업체의 관리책임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대우건설 관계자는 “하도급계약을 맺기 전에는 재무제표상으로 문제가 없는 기업이어서 하청업체나 대기업이나 똑같은 피해자”라며 “원청업체도 자금난을 미리 알아채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공사비와 임금을 이중지급하게 돼 피해가 크다”면서 “하도급업체의 도산이 계속될 경우 앞으로가 더 큰 걱정”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채권단은 대기업의 무책임한 처사라는 입장이다. 채권단 조사 결과 대남토건 대표는 법원에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를 신청하기 전 개인재산을 가족명의로 이전했다. 또한 다른 현장에서는 원청업체 담당자와 협의해 공사대금을 직접 수령하기도 했다. 채권단 관계자는 “재산을 빼돌리고 법 규정도 무시해가면서 공사비를 횡령하는 동안 원청업체에서 아무런 조치나 대책이 없다가 뒤늦게 다른 하도급업체를 선정하는 관리부실이 만연하다”며 “수의계약 등의 관행과 하도급거래 이후의 관리시스템이 개선되지 않으면 임금체불 문제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그런데도 국토교통부에 민원을 제기하면 법적인 책임만 운운하니 답답한 심정”이라고 토로했다.

현행 ‘건설산업기본법’과 ‘하도급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은 발주자와 시공사에 근로자 보호나 하도급 심사에 대한 의무를 부과하지만 현실적으로는 한계가 있다. 국토교통부 관계자는 “하도급거래 이후의 책임을 묻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면서도 “그나마 법률상 근로자 보호 등의 의무가 있는 점을 대기업들이 명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경남 창원감계 힐스테이트2차 조감도. /사진=머니투데이 임상연 기자

◆발주자는 무책임한 시스템
대기업 원청업체는 법적책임을 이유로 공사비를 재지급하지 않거나 최소한의 보상안을 제시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임금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는 게 대다수의 설명. 복수의 건설업계 관계자는 “임금은 근로자 개개인의 생계와 직결되는 만큼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100% 보상해주는 것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문제는 영세 자재업체 같은 곳이 공사비를 떼이면 역시 직원 임금체불로 이어지기 때문에 복잡하다. 사안에 따라 보상안도 다를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이렇듯 임금체불에 대한 보상이 적극적으로 이뤄지는 이유는 대기업의 도의적인 책임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일정한 기준 없이 주먹구구식 보상이 이뤄지는 실정이라 임금체불과 관련한 분쟁은 해결이 어렵고 대기업도 2~3차 피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학계나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발주자의 지급의무를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건설업계는 공사 규모가 크거나 현장이 많은 대기업일수록 중간 하도급업체의 도산에 따른 피해도 클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지난해 국정감사 결과 LH(한국토지주택공사)가 2010~2015년 발주한 현장의 공사비와 임금체불 규모는 서희건설, TEC건설, 우미건설, 현대건설 순으로 나타났다. 체불 규모 10위권 안에는 시공능력평가 10대 건설사 중 현대건설이 유일했다. 전체 체불건수와 금액은 각각 1500건, 500억원이 넘는 것으로 조사됐다. 2015년 국정감사에서는 서희건설, 남해종합개발, 현대건설, 한신공영, 대우건설, 계룡건설, 신일건업 순으로 체불 규모가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

☞ 본 기사는 <머니S>(www.moneys.news) 제490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