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제너럴모터스(GM)가 대우자동차를 인수할 때 국내에는 우려의 시각이 많았다. 대우차 인수 후 GM은 흔들리기 시작했고 GM대우를 설립한 지 3년도 안된 시점부터 한국시장 철수설이 불거졌다. 어려움을 겪던 GM이 2009년 결국 파산하고 중국 상하이자동차의 쌍용자동차 ‘먹튀’ 사태가 발생하자 이런 우려는 극에 달했다.
GM 파산 이후 8년여의 시간이 지났다. 그간 철수설이 숱하게 나왔지만 GM대우는 한국지엠으로 이름만 바꿨을 뿐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 GM의 한국 철수설이 재점화됐다. 앞서 제기된 수많은 루머를 고려하면 가볍게 여길 수도 있지만 현재 한국지엠이 겪는 위기감은 이전과 무게가 다르다.
지난달 17일 금속노조 한국지엠 지부가 산업은행 한국지엠 지분 매각을 반대하며 결의대회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전신 기자
◆ 산은 방어장치 사라져
최근 한국지엠 철수설이 다시 부각된 이유는 한국지엠의 주주인 KDB산업은행이 철수에 대한 우려와 방어의 한계를 인정해서다.
산은은 최근 국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한국지엠의 국내 철수가능성과 실제 철수가 진행되면 막기 어렵다는 내용을 언급했다. 지상욱 바른정당 의원에 따르면 산은이 제출한 ‘한국지엠 사후관리 현황’ 보고서에는 한국지엠이 국내에서 철수할 우려가 있고 산업은행이 이를 막을 방도가 없다는 점이 명시됐다.
산은은 한국지엠의 경영실적 악화와 GM 본사 차원의 글로벌 구조조정 등을 근거로 한국지엠의 철수 가능성을 제기했다. 또 산은이 최근 한국지엠의 경영실태 파악을 위해 주주감사에 착수했으나 한국지엠의 거부로 감사가 중단된 사실도 언급했다.
현재 한국지엠의 지분은 GM본사와 계열사 76.96%, 중국 상하이자동차 6.02%, 산은 17.02%로 구성됐다. 상하이자동차 지분은 GM 우호지분으로 분류된다. 산은의 지분은 경영에 관여하기에 턱없이 낮지만 GM이 대우차를 인수할 당시 맺은 조약 덕분에 그간 철수 우려를 불식할 수 있었다.
2002년 10월 GM은 대우차를 인수하며 25% 이상의 주주에게 15년간 비토권을 부여했다. 당시 28%의 주식을 소유했던 산은이 보호장치 명목으로 마련한 조항인데 주주총회가 총자산의 20%를 초과하는 자산을 처분하거나 양도하기로 결정하더라도 이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다. 2009년 GM이 단독 유상증자를 하며 산은 지분이 축소됐지만 협의를 통해 15% 이상의 지분에 비토권을 주도록 수정했다.
문제는 이 조항이 오는 10월 만료된다는 것이다. 비토권이 없을 경우 17%의 지분은 의사결정에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다. 주주총회 결의는 GM계열사가 가진 지분만으로 충분하다. 산은이 보고서에 언급한 ‘철수 방어의 한계’는 이런 상황을 언급한 것이다.
일각에서는 2010년 GM과 산은이 개정해 체결한 비용분담협정(CSA)의 내용이 GM의 철수를 막을 장치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당시 김영기 산은 전 부행장은 CSA에 대해 GM과 한국지엠(당시 GM대우)이 공동개발한 기술에 대해 항구적인 무상 사용권을 확보했다고 밝힌 바 있다. 여기엔 공동 소유권은 아니지만 GM이 철수할 경우 3년간 GM의 데이터룸에서 필요한 기술을 이전해 올 수 있도록 하는 내용도 담겼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GM으로선 한국지엠을 철수할 경우 쉐보레브랜드가 보유한 소형차 기술 대부분이 유출될 수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현재 이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되지 않고 있다. 한국지엠 측은 “당시 CSA 개정은 한국지엠이 GM에 과도한 로열티를 내는 부분에 대해 개선한 것이 주 내용”이라며 “당시 기사에 나온 항구적 기술사용권이라는 표현은 커뮤니케이션 상의 오류였던 것 같다”고 말했다.
◆ 경쟁력 강화만이 살길
철수설이 잦아들지 않지만 한국지엠의 공식입장은 변함이 없다. 한국지엠 관계자는 “산업은행 지분과 관계없이 한국에서 사업을 유지하겠다는 GM의 입장은 변함 없다”고 일축했다.
GM의 공식적인 입장도 동일하다. 스테판 자코비 GM 해외사업부문 사장은 최근 “GM은 수익성 강화와 미래사업 경쟁력 확보 차원에서 적정한 시장을 유지하고 있으며 여기에는 한국도 포함된다”며 “한국은 생산과 제품개발 및 디자인 분야에서 글로벌사업의 주요 거점 중 하나”라고 밝혔다.
실제로 GM이 한국에서 단기간에 철수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지분정리와는 별개로 보유한 공장의 매각이 쉽지 않아서다. 한국지엠은 인천광역시, 창원시, 군산시, 보령시 등 4곳에 공장을 갖고 있는데 자동차업계가 잔뜩 위축된 상황에서 이 공장들을 처분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한국지엠의 적자가 지속되는 이상 철수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에 따르면 한국지엠은 2014년 3332억원의 순손실을 시작으로 2015년 9930억원, 2016년 6315억원의 순손실을 내는 등 3년 연속 적자를 기록했다. GM의 입장에서는 지속되는 적자와 한국철수에 드는 비용을 저울질할 수밖에 없다. 지속되는 적자규모가 철수비용보다 커진다면 결정은 불을 보듯 뻔하다.
전문가들 역시 한국지엠의 존립에 있어 중요한 것은 산은의 비토권 유무가 아닌 경쟁력 확보 여부라고 입을 모은다. 매각 당시 산은과 GM이 합의한 15년의 유지기간은 연착륙할 시간을 마련한 것이고 결국은 산업 경쟁력에서 존립이나 철수가 결정될 수밖에 없다는 것.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글로벌 보호무역주의가 강화되는 상황에서 외국기업을 언제까지나 조항으로 묶어둘 수는 없다”며 “결국 GM과 한국이 윈-윈하는 구조를 만들지 못하면 한국지엠의 존립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01호(2017년 8월16~22일)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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