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금융산업을 대표하는 은행이 사면초가에 빠졌다. 최첨단 정보통신기술을 앞세운 케이뱅크, 카카오뱅크가 출범하면서 고객들은 더 빠르고 편리한 금융서비스에 열광한다. 자칫하면 기존 시중은행에 충성하던 고객들이 대거 인터넷은행으로 빠져나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머니S>는 인터넷은행이 몰고 온 변화와 위기에 직면한 시중은행이 생존할 수 있는 대안을 모색했다.<편집자주>
#1. 2007년 초 금융권 최대 히트상품은 옛 하나은행(KEB하나은행)이 출시한 ‘마이웨이카드’였다. 이 카드는 교통카드 이용 시 월 최대 4000원 할인과 쇼핑·영화·외식·주유 할인 등 범용서비스를 통합 제공해 당시엔 획기적인 상품으로 주목받았다. 출시하자마자 입소문이 퍼져 한달여 만에 판매실적 10만장을 돌파했고 두달도 안돼 업계 추산 30만장을 넘어섰다. 하지만 이 상품의 수명은 오래가지 못했다. 카드업계의 출혈경쟁을 유발할 수 있다는 이유로 금융당국이 제동을 걸어 두달여 만에 신규판매가 중단됐기 때문이다.
#2. 은행 신상품개발부서의 결재체계는 일반기업과 사뭇 다르다. 회의를 거쳐 새로운 개념의 신상품을 개발하면 부서장과 부행장, 은행장뿐 아니라 금융당국의 승인을 거쳐야 한다. 신상품이 세상에 빛을 보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되고 이 역시 금융당국 입맛에 맞지 않으면 승인이 거절되거나 무기한 보류된다. 상품이 출시되기까지 거쳐야 할 최종관문이 따로 있는 것이다. 이는 IMF 외환위기 이후부터 지금까지 바뀌지 않은 관행이다.
◆보수적인 금융문화… 구조 변화 필요
시중은행의 고민이 깊어졌다. 금융IT기술은 점점 진화하는데 정작 시중은행은 고객의 니즈를 충족할 플랫폼과 콘텐츠 개발에 나서지 못하고 있어서다. 해외시장 진출도 더디다. 그나마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진출속도를 높이고 있지만 아직 실적상승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신규사업보다는 과거에 진행한 사업으로만 수익을 내는 셈이다.
이런 가운데 올 상반기 잔잔했던 ‘금융저수지’에 메기가 등장했다. 인터넷전문은행과 P2P업체가 그것. 그동안 시중은행 외엔 경쟁자가 없었던 곳에 새로운 경쟁자가 나타나면서 은행들은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환경에 직면했다. 인터넷은행이 기존 은행고객을 대거 유치하고 P2P업체가 틈새시장 공략에 나서는 동안 시중은행은 이를 지켜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왜 시중은행은 인터넷은행처럼 혁신적인 플랫폼과 상품을 만들지 못하는 것일까. 전문가들은 구조적 문제와 은행의 보신주의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은행권에는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금융소비자 보호기능이 점차 강화되면서 섣불리 튀는 행동을 했다가 금융당국의 타깃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해서다. 굳이 규제리스크를 떠안고 신상품 개발에 나설 이유가 없었다.
신상품을 개발하면 당국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제도도 금융산업이 뒤처지는 이유로 꼽힌다. 불과 3~4년 전 은행들은 스포츠 연계상품이나 영화 흥행에 따라 금리를 더 얹어주는 아이디어 예금상품을 쏟아냈다. 하지만 사행성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금융당국이 이를 불허했고 이후 관련 상품은 자취를 감췄다. 최근 들어 다시 영화 관련 예금상품이 나왔지만 언제 다시 사라질지 알 수 없다.
금융연구원의 한 연구위원은 “신상품을 개발할 때 금융당국이 보수적으로 평가해 승인하기 때문에 판박이 상품만 쏟아진다”며 “외국에서는 일단 상품(플랫폼)을 출시한 후 문제가 생기면 바로 잡는데 우리나라는 승인을 받아야 신상품을 출시할 수 있는 구조다. 금융산업이 선진화되기 힘든 시스템”이라고 지적했다.
은행권 관계자는 “혁신적인 상품을 개발하면 과당경쟁이나 출혈경쟁 논란에 휩싸인다”며 “중간만 하면 된다는 기업문화가 형성된 것이 사실”이라고 토로했다. 또 다른 은행 관계자도 “새로운 상품을 개발하면 얼마 후 다른 경쟁은행이 이를 벤치마킹해 금세 경쟁이 식어버린다”며 “인터넷은행처럼 상품을 개발해도 이슈의 핵으로 끌고 가기 힘든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자구노력 시급… 은행이 답 찾아야 할 때
은행의 자구노력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실체가 없는 관치금융을 탓하기 전에 시중은행 스스로 금융산업이 발전하도록 노력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은행은 굳이 혁신적인 상품을 개발하지 않아도 예대마진이나 각종 수수료 등으로 매년 꾸준히 수익을 냈다. 올 상반기엔 사상 최대실적 잔치를 벌이기도 했다. 결국 이 같은 보신주의가 금융산업 발전을 저해한다는 평가다.
이복성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시중은행이 고객에게 이익이 되는 상품을 개발한다면 개발·유지비용이 발생한다. 나아가 규제리스크까지 떠안아야 한다”며 “이 같은 리스크를 감수하고 신상품을 쏟아낼 이유가 없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수익을 내는 데 문제가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금융산업이 발전하려면 시중은행 스스로 변해야 한다”며 “은행의 이익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고객 입장에서 효율적인 금융상품을 개발하고 합리적인 경쟁이 이뤄지는 분위기가 조성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금융당국도 변화가 요구된다. 금융당국은 ▲금융시장의 안정 ▲투자자보호 ▲금융산업 발전 등을 최우선정책으로 삼는다. 은행이 부실화되지 않도록 관리하고 금융소비자 보호기능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나아가 금융산업이 꾸준히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 감독당국의 핵심역할이다. 이와 관련 금융전문가들은 금융산업 안정과 투자자 보호기능은 강화됐지만 금융산업 발전정책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이는 관치금융과 연관이 깊다. 금융당국은 금융지주 회장과 은행장 등 최고경영자 인사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한다. 정권 입맛에 맞는 최고경영자가 선임되면 은행 내부에선 줄타기가 유행할 수밖에 없고 이는 곧 은행산업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가 된다.
금융권 관계자는 “금융소비자는 점점 진화하는데 은행서비스는 좀처럼 개선되지 않는다”며 “신상품을 개발할 능력이 없는 건지, 안하는 것인지 이젠 은행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할 때”라고 진단했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01호(2017년 8월16~22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