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 힘들다’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린다. 모두 ‘잘 살기’ 위해 노력하는 데 현실은 녹록지 않다.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 규모가 세계 11위에 달함에도 국민의 삶의 질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머니S>가 창간 10주년을 맞아 취업인사포털 사람인과 함께 ‘웰빙’에 대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설문은 지난 8월14일부터 29일까지 온라인에서 이뤄졌고 20~60대 성인 1455명이 참여했다. 설문응답을 기반으로 웰빙을 좌우하는 재정상황, 직장생활, 가족과 건강문제 등 현주소를 짚어보고 그들의 고민과 생각을 들어봤다. 또 그들에게 닥친 위기를 우리 사회가 어떻게 해소해야 할지 알아봤다.<편집자주>
우리나라의 직장인 중 85%가 ‘번아웃증후군’(burnout syndrome)을 경험한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는 직장인들이 무기력증, 자기혐오, 직무거부 등에 빠지고 심하면 수면장애, 우울증, 심리적회피 등을 호소한다.
우리나라 주당 평균노동시간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2위인 점을 생각하면 한국의 직장인 대부분이 번아웃증후군에 시달리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 주당 평균노동시간은 44.6시간으로 OECD 국가의 평균(32.9시간)보다 무려 10시간 이상 길다.
신한금융그룹. /사진=머니투데이 DB
◆불안한 고용에 묵묵히 일만
<머니S>는 창간 10주년을 맞아 취업포털 사람인과 함께 1455명을 대상으로 ‘웰빙한 직장생활’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51.9%의 응답자가 직장생활에 만족하지 못하는(불만족 33.0%, 매우 불만족 18.9%) 것으로 나타났다. 만족한다고 답변한 직장인은 15.3%(만족 12.8%, 매우 만족 2.5%)에 불과했다.
이에 법정 근로시간을 줄여 삶의 질을 높여야 한다는 점에 사회적 공감대가 높다. 그러나 근로시간만 줄인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회사 내 틀어박힌 고질적인 문제부터 해결하지 않는 이상 직장인의 삶의 질이 나아질 가능성은 희박하다.
설문조사에 따르면 법정 근로시간 단축은 허울 좋은 미명에 불과했다. 법의 둘레를 벗어난 연장근무와 직장상사의 눈치를 보느라 앞뒤로 당겨지고 밀려난 출퇴근시간, 직장 내 소통 부재, 업무강도에 비해 낮은 연봉 등 설문조사 문항마다 불만이 셀 수 없을 만큼 쏟아졌다.
이 같은 직장인의 불만은 규모가 크지 않은 중소기업에서 많이 나타났다. 일부 중소기업의 경우 연장근무를 하더라도 초과근무수당이 지급되지 않는다. 회사는 근로기준법에 따라 초과 근무수당을 지급해야 하지만 직원 입장에서는 챙기기가 어려운 게 현실이다. 쉬어야 하는 주말에 출근하는 직장인도 있다. 특근수당이 지급되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이조차 녹록지 않다. 이들 직장인에게 복지는 단지 ‘꿈’일 뿐이다.
뿐만 아니라 연차휴가를 쓰려고 해도 직장상사의 눈치를 봐야 한다. 다들 일하는 분위기인데 괜히 연차휴가 얘기를 꺼냈다가 밉보이기라도 하면 회사생활이 쉽지 않을 게 뻔해서다. 직장상사의 눈치를 보느라 더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는 행태도 깊숙이 박혀 있다. 점심시간을 제외한 하루 근무시간은 8시간인데 눈치를 보며 출퇴근하다보면 어느덧 실근무시간이 10시간을 넘어서니 직장생활이 만족스러울 리 없다.
이처럼 회사에 올인하는 직장인들의 가장 큰 불만은 ‘업무강도보다 낮은 연봉’이다. 설문조사에서도 응답자의 35.1%가 ‘낮은 연봉’을 가장 큰 문제로 꼽았다. 그러나 불만을 표현하는 직장인은 많지 않다. 고용이 불안한 현실에서 직장 구하기가 쉽지 않아서다. 이들은 자신의 능력을 활용할 필요가 없는 일을 맡아도, 발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비정규직이라도 그저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를 위로한다.
미래가 없는 현실이 절망적이지만 우리 사회는 이미 ‘사오정’(45세 정년)이라는 말이 일반화됐을 정도로 조기퇴직이나 희망퇴직이 흔해졌다. 과거에는 승진하면 빨리 나가야 하니 천천히 올라가는 게 낫다고 했다. 하지만 이제 어차피 조기퇴직은 피할 수 없으니 승진이라도 하고 나가는 게 낫다는 말이 나온다.
(왼쪽부터)LG생활건강, 쿠팡물류창고. /사진=머니투데이 DB
◆해결책은 ‘유연근무제’… 우려 시각도
그래도 모두가 절망적이진 않다. 직장인의 고충을 해소할 수 있는 대책을 내놓는 기업도 종종 눈에 띄기 때문이다. 일과 삶의 균형을 의미하는 ‘워라밸’(work-life balance)을 내세우며 직원의 삶의 질을 높여 업무의 효율을 끌어올리겠다는 구상이다. 대안을 내놓지 않고 직원에게 인내할 것만 강요하는 행태를 조금씩 고쳐나가겠다는 시도로도 풀이된다.
먼저 전 계열사를 대상으로 맞춤형 유연근무제를 시행한 신한금융그룹이 눈길을 끈다. 신한BNP파리바자산운용은 증권시장 마감 후 본격적으로 업무를 시작해 야근이 불가피한 펀드관리팀의 야간근무자를 대상으로 익일 출근시간을 오후 1시로 조정했다. 신한캐피탈은 임신한 여직원, 초등학교 저학년 자녀를 둔 직원을 대상으로 근무시간을 단축하는 ‘육아기 단축근무제’와 휴일근무자에게 별도 휴가를 부여하는 ‘휴일대체근무제’를 시행했다.
개인 상황을 고려해 근무일정을 선택할 수 있는 유연근무제를 도입한 이커머스기업 쿠팡도 눈에 띈다. 쿠팡은 최근 배송직원인 쿠팡맨을 대상으로 각 개인의 상황을 고려해 주 2·3·4일 파트타임 및 주 5·6일 풀타임 등 다양한 근무일정을 선택할 수 있는 제도를 도입했다. 가능한 일수만큼 근무하고 그에 부합하는 보수를 받는 것. 쿠팡 측은 다양한 이유로 유연한 근무형태를 원하는 직원에게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LG생활건강도 오전 7시부터 오후 4시,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 등 유연하게 출퇴근시간을 선택할 수 있는 ‘플렉시블타임제’를 운영 중이다. 효율적인 시간관리를 위해 외부 회의시간을 계획할 경우에는 출근 또는 퇴근시간과 연계되도록 일정을 잡는 것을 권장한다.
이처럼 일부 기업이 직원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동시에 업무 효율성도 높이기 위한 방안으로 유연근무제를 선택했다. 이를 통해 직원뿐만 아니라 기업 입장에서도 인력을 유용하게 활용해 비용을 절감하고 생산성 향상으로 성과를 높일 수 있다. 조하현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기업은 일과 가정의 양립이 가능하도록 ‘과로 문화’를 없애고 근로자 스스로 자신의 근무형태를 선택하게 해야 한다”며 유연근무제 확산을 지지했다.
하지만 유연근무제 도입에 따른 우려도 나온다. 유연근무제 도입이 비정규직 확대와 여성 일자리의 질 저하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단시간근로자와 재택근무자, 원격근무자는 대체로 계약직이나 기간제, 파견직의 형태로 채용된 경우가 많다. 또 육아부담이 있는 여성이 유연근무제를 선택할 가능성이 높은 만큼 유연근무제로 인한 비정규직의 확대가 곧 여성근로자의 비정규직 확대로 이어질 수 있는 점도 해결해야 할 문제다. 웰빙한 직장생활. 기업이 하나둘씩 나서고 있어 기대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06호(2017년 9월20~26일)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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