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중국의 거세지는 통상압력에 재계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미국의 자국산업 보호를 위한 통상압력과 한반도 내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를 계기로 시작된 중국의 한국기업 차별이 나날이 강도를 더하고 있다. 정부와 재계가 머리를 맞대고 대책 마련에 나섰지만 민감한 국제정세와 연동된 탓에 뚜렷한 묘수가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미국 통상압력에 속수무책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는 지난 5일 가정용 전자제품 제조사 월풀이 삼성전자와 LG전자를 겨냥해 낸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 청원을 심사한 결과 자국 세탁기산업이 피해를 보고 있다고 만장일치로 판정했다.
이에 따라 앞으로 공청회 등 후속절차를 거쳐 삼성전자·LG전자 제품에 대해 관세 인상과 수입량 제한 등 세이프가드를 발동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한국산 제품에 대한 세이프가드는 2002년 철강 제품에 적용된 게 마지막일 정도로 오래됐다. 당시 미국은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돼 협정 위배 판결을 받았다.
재계 안팎에선 미국이 한국 철강분야 반덤핑 관세 조치에 이어 15년 만에 전자제품에 대한 세이프가드 카드까지 꺼낸 것을 근거로 이번 조치가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타 산업분야로 확대될 것을 우려한다. 특히 지난달 22일 한국산 태양광 제품에도 같은 조치가 내려진 터라 기우가 아닐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ITC는 이달 19일 구제조치에 대한 공청회를 열고 11월21일 구제조치 방법 및 수준을 결정한 뒤 12월4일까지 피해판정, 구제조치권고 등을 담은 보고서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제출한다. 이후 60일 이내에 트럼프 대통령이 승인하면 세이프가드가 발동된다. 이 경우 한국기업은 관세를 더 물거나 수출량을 줄여야 한다.
재계가 예상하는 삼성전자·LG전자의 피해 규모는 연 10억달러(약 1조1300억원) 수준이다. 태양광업계에선 한화큐셀·LG전자·현대중공업그린에너지 등이 미국에 태양광전지와 패널을 직접 수출하고 있어 직격탄을 맞을 것으로 우려한다.
해법을 모색하기 위해 지난 11일 산업통상자원부, 외교부, 삼성전자, LG전자 등이 서울 중구 상의회관에서 세이프가드 민관 대책회의를 열었지만 원론적 수준의 대책만 논의된 것으로 알려졌다.
강성천 산업부 차관보는 회의 직후 취재진과 만나 “ITC 예비판정에서 제외됐던 점을 들어 한국산 세탁기는 적용이 제외되도록 공청회에서 주장할 방침”이라며 “미국 내에서 생산되지 않는 프리미엄 세탁기와 세탁기 부품 등이 세이프가드 적용에서 제외돼야 한다는 점도 강조해 우리 기업의 피해를 최소화하겠다”고 말했다.
국내에서 생산하는 제품은 한·미FTA(자유무역협정)에 따라 세이프가드 적용에서 제외되며 한국 외 지역에서 생산해 미국시장에 판매되는 세탁기는 제재 대상에 포함된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미국 수출용 세탁기를 한국에서 만들지 않으며 LG전자는 국내 생산 비중이 20%에 불과하다. 정부의 대책이 실질적 효과를 내려면 삼성전자·LG전자가 동남아 등에서 생산하는 세탁기 물량을 한국으로 이전해 생산해야 하지만 소요시간과 인건비 차이 등을 감안하면 이마저도 쉽지 않다.
이에 따라 가전업계에선 삼성전자·LG전자가 미국 현지에 건설할 예정인 가전공장의 고용창출 효과 등을 전면에 내세워 미국정부를 설득한다는 방침이다. 양사는 각각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와 테네시주에 수천억원을 투입해 가전공장을 건설할 계획이다.
가전업계 관계자는 “트럼프 행정부가 출범한 이후 미국이 취하는 강력한 보호무역주의 기조를 감안하면 세이프가드 발동 가능성이 높다”며 “현재는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현지공장 설립과 효과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미국정부를 설득하는 게 최선”이라고 말했다.
이 가운데 한·미FTA 개정논의가 시작돼 재계의 부담이 가중됐다. 한미 양국은 지난 4일 FTA를 개정하기로 하고 각국에서 개정 협상 절차를 밟기로 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대선후보 시절부터 대한국 무역적자 해소를 위해 한·미FTA 개정을 강력하게 시사했던 만큼 미국은 한국의 대대적 양보를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전략이 구체적으로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한·미FTA 개정으로 직격탄이 예상되는 국내 기업은 현대자동차와 포스코다. FTA로 한국자동차에 대한 관세(2.5%)가 지난해 폐지됐지만 FTA 체결 이전으로 복원될 가능성이 높고 철강업계에선 한국산 철강 제품에 반덤핑·상계관세가 더 엄격하게 부과될 것으로 예상한다. 철강·전자·자동차 등 한국경제의 수출 주력업종이 모두 중대한 기로에 선 셈이다.
◆중국 사드 보복에 한숨만
미국과 세계 패권을 두고 주도권 다툼을 벌이는 중국도 사드 배치를 계기로 한국에 대한 무역 보복을 강화하고 있다. 중국은 공식적으로 사드 보복이 없다는 입장이지만 현실은 다르다. 현대·기아차는 세계 최대시장으로 급부상한 중국 내 자동차 판매량이 반토막 났고 중국 사업장의 잇단 영업정지에 시달린 롯데는 버티지 못하고 철수를 결정했다.
차세대 먹거리인 전기차 배터리사업과 관련해 중국에 생산 관련 합작법인을 설립하려는 삼성·SK·LG는 중국정부의 배제조치로 시간만 보내고 있다. 또 중국정부가 한국기업이 생산한 배터리가 탑재된 전기차 모델을 전기차 보조금 대상에서 제외해 판매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정부는 북한의 핵도발이 이어지며 군사적 의존도가 큰 미국과 경제적 의존도가 큰 중국 사이에서 전략적 모호성 전략을 취하며 애매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재계 관계자는 “기업이 가장 싫어하는 게 불확실성인데 국제정세와 연결된 미국과 중국의 경제조치에 정부가 애매한 태도를 보여 기업 입장에선 어떤 결단도 내리기 힘든 상황”이라며 “정부가 전략적 모호성 콘셉트를 버리고 어느 쪽이든 결단을 내려줘야 그에 맞춰 대응할 수 있다”고 말했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10호(2017년 10월18~24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