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도 순성(巡城)놀이라는 것이 있었다. 새벽에 도시락을 싸들고 5만9500척(尺)의 전 구간을 돌아 저녁에 귀가했다. 도성의 안팎을 조망하는 것은 세사번뇌에 찌든 심신을 씻고 호연지기까지 길러주는 청량제의 구실을 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현재 서울은 도성을 따라 녹지대가 형성된 생태도시의 면모를 보여주기에 충분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복원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해설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다. 수년간 한양도성을 해설한 필자가 생생하게 전하는 도성 이야기를 소개한다. <편집자주>


/사진=머니투데이 DB


돈의문(敦義門)은 서대문의 정식 명칭이다. 태조 때 흥인문의 속칭은 동대문이며 숭례문은 남대문으로 불렀다. 돈의문과 숙정문은 각각 정서문, 정북문으로 부른 기록이 있지만 서대문이나 북대문이라는 속칭은 보이지 않는다.
돈의문의 옛터는 어디일까. 경향신문사 옆 새문안길 건너편 언덕 위에 강북삼성병원이 보이고 병원에 들어가기 전 콘크리트보도 난간에 나무판을 짜 맞춘 담장 비슷한 것이 보인다. 거기에 돈의문 자리임을 표시한 표지판이 있다.

공공미술작품 ‘보이지 않는 문’이다. 이 표지판에는 ‘돈의문 터 1422~1915’라고 적혀있다. 1422년은 세종 때고 1915년은 일제강점기다.


◆다양한 이름의 돈의문

그렇다면 태조 때 돈의문 자리는 어디였을까. 태조 5년(1396) 도성 축성 당시에는 돈의문이 지금보다 한참 위에 위인 지금의 사직동에서 독립문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에 있었다. 지금의 사직터널 위가 되는데 이곳은 운종가에서 정서 방향으로 난 길이었다. 그러다가 태종 13년(1413) 풍수학자 최양선의 건의로 이 성문을 폐쇄하고 더 남쪽으로 옮겼다. 이때 성문 이름도 서전문(西箭門)으로 고쳤다.

태종 13년 6월19일 실록기사에는 ‘신문(新門)을 성의 서쪽에 열어서 왕래에 편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서전문의 입지 선정 당시 처음에는 당대 권신이었던 이숙번의 집 앞에 세우려 했는데 그가 인덕궁(정종이 태종에게 양위한 후 상왕으로 거처했던 궁궐) 앞이 더 적합하다고 주장, 자신의 집 앞에 성문이 세워지는 것을 막았다. 하륜과 더불어 태종 등극의 일등공신이었던 그만이 할 수 있는 위세다.


하지만 이 서전문은 10년도 채우지 못하고 다시 폐쇄됐다. 세종 4년(1422) 2월23일 기사에 ‘서전문을 막고 돈의문을 설치했다’는 내용이 병기된 것으로 그와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때가 토성을 석성으로 수축할 때였다. 공공미술작품 ‘보이지 않는 문’에 적힌 시작연도가 1422년인 까닭이다. 그러니까 현재 돈의문 자리는 세번째 자리다.

사람들은 태종 때 새로 지은 서전문을 ‘신문’이라 했고 세종 때 지은 돈의문도 신문이라 했다. 그리고 신문을 향해 낸 큰길을 ‘신문로’라고 했다. 사람들은 그런 연유로 서대문 안을 ‘새문안’이라고 불렀고 그 길은 ‘새문안길’이 됐다.

돈의문 문루는 축성 초기부터 있었을까. 중국사신이 드나들었기 때문에 태조 때부터 문루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태조 때 문루가 건설됐다는 기록은 없다. 숙종 때에야 돈의문 문루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숙종 37년(1711) 6월3일 광희문의 홍예문 축조가 끝난 후 광희문 문루를 먼저 올리려다가 재목이 모두 준비되지 않아 금위영에서 다음에 올리는 것을 허락해달라고 하자 숙종은 그 재목으로 돈의문 문루를 먼저 올리도록 했다. 이로써 정서문인 돈의문은 흥인문과 숭례문에 이어 세번째로 문루가 있는 성문이 됐다. 도성 축성 이후 316년 만의 일이었다.

고종 6년(1899) 돈의문으로 전차가 다닐 때만 해도 성곽은 헐리지 않고 온전했다. 그런데 1915년 일제의 ‘시구역개수계획’의 일환으로 전차궤도 복선화공사가 진행됨에 따라 헐리고 말았다. 일제는 돈의문을 경매에 부쳤고 염덕기가 205원에 낙찰받았다. 현재가치로 약 500만원이다.

◆경교장과 백범 김구


안두희 총탄이 뚫고 나간 유리창. /사진제공=허창무 한양도성 해설가



종로구 평동 현재 강북삼성병원 동편 입구를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으로 단정한 2층건물이 보인다. 병원 본관의 부속건물처럼 보이지만 이 건물이 경교장이다. 서울시가 2001년 4월6일 서울시문화재 제129호로, 2005년 6월13일 사적 제 465호로 지정해 보호하는 문화유산이다.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금광으로 횡재한 친일파 거부 최창학이 지은 별장이었는데 광복 후 이 집을 임시정부 주석 백범에게 기증했다.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에게 비행기를 헌납하는 등의 친일행위를 덮으려고 했을 것이다.

원래 이름은 일본식 이름인 죽첨장(竹添莊)이었지만 김구 주석이 거주하면서 근처 만초천에 있는 다리 경구교(京口橋)의 약칭인 경교라는 이름으로 바꿔 불렀다. 광복 정국에서 이 저택은 이승만의 이화장(梨花莊), 김규식의 삼청장(三淸莊)과 함께 건국활동의 3대 중심지가 됐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들과 함께 귀국한 김구는 1949년 6월26일 11시30분쯤 경교장 집무실에서 육군 포병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될 때까지 이곳에서 생활했다. 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광복 후의 건국활동, 반탁과 통일운동을 이끌었다. 특히 이곳은 상당기간 임시정부공관과 한국독립당 본부 구실을 했고 김구를 따르는 조완구, 조소앙, 조성환, 엄항섭 등 임정요인들의 활동무대이기도 했다. 남한단독정부가 수립된 후에도 남북협상의 자주적 통일운동이 본격화되기까지 이곳에는 많은 정치인이 집결했다. 1949년 7월5일 수많은 인파가 이곳에 몰려 효창공원으로 떠나는 백범을 애도했다.

경성공업전문학교 건축과를 졸업한 김세연이 설계해 1939년 고전주의풍으로 완공한 경교장은 좌우대칭의 지상 2층, 지하 1층, 연건평 872.7m2의 규모의 건물이다. 당시로는 보기 드물게 정면 중앙 1층에는 승·하차시설을 갖춘 현관을 설치했으며 당구실과 이발실까지 둔 초호화건물이었다.

현재 이 건물 2층 당시 백범의 침실에는 암살범 안두희가 총을 쏠 때 서 있었던 위치가 표시돼 있고 총알이 관통했던 유리창 모형이 재현됐다. 시해장소에는 피살 당시 피 묻은 옷, 피살과 관련된 사진도 전시됐다. 지하공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백범기념관도 마련했다.

백범이 서거한 후 경교장의 소유권은 다시 원주인 최창학에게 돌아갔다. 그 이후 대만대사관으로 사용되다가 한국전쟁 때는 미군 특수부대가 주둔했고 휴전 후에는 월남대사관저로 쓰였다가 1967년 삼성이 매입하면서 현재 강북삼성병원이 됐다. 인수 후에도 고려병원을 지으면서 헐릴 뻔했고 1996년 2월 병원 증축 때도 헐릴 뻔했으나 그때마다 여론에 밀려 성사되지 못했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18호(2017년 12월13~19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