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상비의약품(이하 상비약) 품목조정을 놓고 정부와 대한약사회가 정면으로 충돌했다. 상비약은 의사의 처방전 없이 구입할 수 있는 일반의약품 중 가벼운 증상에 시급하게 사용하며 환자 스스로 판단해 사용할 수 있는 의약품으로 편의점처럼 24시간 운영되는 곳에서 판매된다.

현재 해열진통제 5종(타이레놀500㎎·타이레놀160㎎·어린이용 타이레놀80㎎·어린이 타이레놀현탁액·어린이 부루펜시럽, 감기약 2종(판콜에이·판피린티), 소화제 4종(베아제·닥터베아제·훼스탈골드·훼스탈플러스), 파스 2종(제일쿨파프·신신파스아렉스) 등 총 13개 품목이 상비약으로 지정됐다.


◆정부, 상비약 품목조정 예고

이 품목은 2012년 지정된 것으로 국민의 수요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오자 정부는 지난해부터 상비약 품목 조정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고려대학교 산학협력단 최상은 교수가 지난해 6~11월 기초연구를 진행한 결과 편의점 등에서 상비약을 구매한 비율은 2013년 14.3%에서 2015년 29.8%로 2배가량 증가했다.

특히 품목수에 대한 국민 설문조사 결과 ‘현 수준이 적정하다’는 의견이 49.9%, ‘부족하므로 확대해야 한다’는 의견이 43.4%로 비등하게 나타났다. 또 최 교수는 연구용역 보고서에서 현재 상비약으로 지정된 해열진통제와 감기약 품목수를 확대하는 방안과 화상연고, 인공누액, 지사제, 알레르기약을 신규로 고려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에 따라 보건복지부는 품목조정 필요성을 검토하기 위해 지난 2월 시민단체, 약학회, 의학회, 공공보건기관 등의 위원추천을 받아 10명으로 구성된 안전상비의약품 지정심의위원회를 출범시키고 3월부터 품목 조정에 대한 논의에 본격 착수했다.


이후 지난 10월까지 4차례 회의를 열고 제산제, 지사제, 항히스타민제, 화상연고 등을 대상으로 의약품 안전성과 접근성 등을 심도 깊게 검토했으며 지난 4일 5차 회의를 열고 논의를 마무리해 최종 의견을 정부에 제시할 계획이었다.


서울 종로구의 한 편의점에 안전상비의약품이 진열돼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

하지만 5차 회의에서 상비약 품목에 지사제와 제산제를 새로 추가하고 기존 판매품목인 소화제 2개를 제외하는 쪽으로 의견이 모이자 표결처리 단계에서 위원으로 참여한 강봉윤 대한약사회 정책위의장이 강하게 반발하며 자해까지 시도해 결국 회의가 무산됐다.
이후 대한약사회는 성명을 내고 “촛불혁명으로 정부가 바뀌었음에도 박근혜정부가 위촉한 위원들로 구성된 지정심의위원회는 국민의 건강과 안전은 외면하고 재벌의 이익을 대변하기에 급급했다”며 “지정심의위원회에 참여해 상비약의 안전성 문제와 관리부실 등 제도의 전면 재검토를 설득하고자 했지만 위원회가 품목확대를 기정사실화하고 회의를 요식행위로 진행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대안도 제시됐지만 정부가 짜여진 각본대로 품목 확대 정책만 밀어붙이고 있다”며 “토론과 합의를 통한 결론 도출을 기대했는데 정부의 일방적인 거수기에 불과하다는 현실을 목도한 만큼 더 이상의 위원회 참여는 무의미하다”고 회의 불참을 선언했다.

나아가 대한약사회는 투쟁위원회를 구성해 상비약 품목조정에 강력히 대응하기로 했으며 오는 17일 전국 지부장·분회장 궐기대회도 열기로 했다.

◆약사회, 정부 밀어붙이기 결사 반대

이에 대해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관계자는 “응급상황에서 필요한 상비약 수준의 의약품에 대해선 약국 외에서도 판매를 허용해야 한다”며 “일반의약품 중에서 필요성이나 요구도가 높고 안전성이 검증된 약의 경우 편의점 판매를 확대하도록 정책이 개선돼야 한다”고 약사회의 반발에 부정적 입장을 밝혔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지정심의위원회의 단일 의견 정리를 위해 이달 중 6차 회의를 개최할 예정”이라며 “그간 진행된 회의에서 위원 10명이 참석한 가운데 충분한 합의와 절충과정을 거쳤지만 일단 약사회가 회의에 참여할 수 있도록 마지막까지 설득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해당 의약품을 직접 공급하는 제약업계는 북지부와 약사회라는 두 갑의 충돌에 말을 아끼며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새롭게 상비약 지정을 논의 중인 의약품을 판매하는 제약사는 판매전략 수립과 유통망 확보 등 사전준비가 필요하지만 드러내놓고 일을 진행하기에는 두 기관의 눈치가 보여 숨을 죽이는 모양새다.

제약업계 관계자는 “제약사 입장에선 복지부와 약사회 모두 부담스러운 기관”이라며 “어느 쪽 편을 들 수 없는 상황이어서 결과가 나오기를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