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1999시즌 유로파 리그(당시 UEFA 컵) 우승을 차지한 파르마 선수단. '세리에 7공주' 일원이었던 파르마는 뛰어난 전력을 앞세워 세계 축구 무대를 호령했다. /사진=로이터

축구 팬들이라면 ‘세리에 7공주’를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AS로마, 유벤투스, 라치오, 파르마, 인터밀란, AC 밀란, 피오렌티나를 지칭하는 이 단어는 이탈리아 구단들이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챔피언스리그와 UEFA컵(현 유로파리그)는 물론, 자국에서도 치열한 우승 경쟁을 벌인 전성기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 기간 안드리 셰브첸코와 파울로 말디니의 AC밀란(이하 밀란)과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와 지네딘 지단을 보유한 유벤투스를 필두로 당대 세계 최고의 투톱 호나우두와 크리스티안 비에리를 앞세운 인테밀란(이하 인테르)이 막강 전력을 과시했다. 여기에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프란체스코 토티가 버티는 AS 로마와 후안 세바스티안 베론과 파벨 네드베드 등 호화 미드필더 진을 보유한 SS 라치오, 후이 코스타를 주축으로 한 피오렌티나 등 공주 모두가 리그 우승이 가능한 스쿼드를 구축했다.

실제로 1999-2000시즌과 2000-2001시즌에는 유벤투스와 밀란의 양강 체제를 무너뜨리고 라치오와 로마가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라치오는 우승 직전 시즌에도 밀란을 승점 1점 차까지 추격한 끝에 준우승을 차지했으며 로마는 2001-2002시즌 리그 2연패 직전까지 이탈리아의 FA컵 대회인 코파 이탈리아에서는 라치오와 파르마, 피오렌티나가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며 ‘이탈리아판 춘추 전국시대’가 펼쳐졌다.

그러나 피오렌티나가 파산 위기를 겪으며 2001-2002시즌 2부 리그인 세리에B로 강등당한 후 7공주의 시대는 막을 내리기 시작한다. 파비오 칸나바로, 릴리앙 튀랑, 지안루이지 부폰 등 월드클래스급 선수를 보유했던 파르마 역시 재정난으로 주축 선수들과 알베르토 질라르디노 등 팀의 미래까지 팔고 하위권을 전전한 끝에 2007-2008시즌 강등됐다.


2006년 이탈리아 축구 역사상 최악의 사태로 꼽히는 ‘칼치오 폴리(구단들이 주도한 승부 조작 사건)’ 이후 영광의 시대를 뒤로 한 채 암흑기에 빠진 세리에A는 2009-2010시즌 인테르가 역사적인 ‘트레블’을 달성했으나 유럽축구연맹(UEFA)이 선정하는 리그 순위는 4위까지 곤두박질 치면서 포르투갈 프리메이라리가와 프랑스 리그앙의 추격을 허용했다.

이후 1부 리그에 복귀해 재정 개선에 나선 유벤투스가 세리에A를 연이어 제패한 데 이어 챔피언스리그에서도 2차례 준우승을 차지하는 등 유럽 대항전에서 선전하며 이탈리아 리그의 중흥을 이끌었다. 특히 지난 시즌에는 유벤투스의 준우승과 더불어 AS로마가 8강에서 FC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역사적인 대역전극을 펼치며 4강에 올라 리그의 경쟁력을 입증했다. 이들의 선전에 힘입어 이탈리아 리그는 독일 분데스리가를 제치고 무려 9년 만에 유럽 축구리그 3위로 올라섰다.

특히 지난 여름 이적시장에서 유벤투스가 거액 1억유로(한화 약 1276억원)를 투자해 세계 최고의 선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영입한 사건은 이탈리아 리그가 셀링 리그에서 탈피함을 알리는 신호탄과 같았다. 네이마르도 지난 7월 축구전문매체 '골닷컴'과의 인터뷰에서 "호날두의 유벤투스 이적은 이탈리아 축구에 많은 변화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와 함께 유벤투스의 7연패 기간 동안 가장 강력한 대항마였던 나폴리는 계속해서 꾸준한 성적을 보여줬으며, 인테르와 밀란 두 형제도 이번 시즌 챔피언스리그 진출권에 오르는 등 선전하면서 부활을 꾀하고 있다.

2015년 두 번이나 파산을 선언하면서 4부리그로 추락한 파르마. 이후 '파르마 칼치오 1913'이라는 명칭으로 새롭게 출발한 파르마는 놀라운 반전을 이뤄낸다. /사진=로이터

◆‘1 유로’에 매각된 이탈리아 강호, 4부리그 추락까지
주목할 만한 요소들이 많은 이번 시즌의 이탈리아 축구에서도 특히 눈여겨볼 팀이 있는데, 바로 ‘파르마 칼초 1913’이다. 2015년 파산으로 세리에D(4부 리그)까지 추락한 파르마가 팀명을 바꾼 후 승격을 거듭한 끝에 세리에A 무대로 다시 복귀했으며 나름 선전을 이어가면서 리그 10위에 위치한 것이다. 15라운드까지 승점 21점을 획득한 파르마는 6위 토리노와의 격차가 단 1점에 불과하다.


2008-2009시즌 세리에B(2부 리그)에서 새롭게 시작한 파르마는 이듬해 곧바로 승격에 성공했다. 그리고 2013-2014시즌에는 가브리엘 팔레타, 마르코 파롤로, 악동 안토니오 카사노를 앞세워 6위로 선전하면서 무려 10년 만에 유럽 대항전 진출권을 따내는 쾌거를 달성했다. 해당 시즌이 구단 창단 100주년이었던 만큼 매우 의미 있는 성과였다.

그러나 재정문제가 또 다시 파르마의 발목을 잡았다. 당시 1700만유로(약 205억5000만원)의 세금을 제때 지불하지 못해 유로파리그 출전권을 박탈당했다. 재정상태는 계속 악화되는 가운데 구단 임직원과 선수들의 월급이 몇개월 째 밀렸으며 선수들이 유니폼을 개별적으로 세탁하고 원정경기에 나설 때는 버스를 빌려 타는 상황에 이르면서 파르마는 파산을 선언했다.

위기 속에서 잠피에트로 마넨티가 새롭게 구단주로 부임했다. 마넨티가 파르마를 인수한 금액은 단돈 1유로에 불과했다. 여전히 많은 액수의 부채가 남았기 때문이다. 마넨티는 당시 "재정문제 해결과 클럽 재건을 위해 힘 쏟겠다"며 취임 소감을 밝혔다.

그러나 파르마에는 희망이 아닌 악재가 찾아왔다. 마넨티가 돈세탁 혐의로 구속된 것이다. 결국 파르마는 2015년 3월 100년이 넘는 유구한 역사를 뒤로 한 채 두번째 파산을 선언했다.

2014-2015시즌 일정이 마무리된 후 파르마의 최종 성적은 6승 8무 24패 승점 24점이었다. 파르마는 최하위(20위)에 그치며 7년 만에 세리에B로 강등이 확정됐다.

그러나 파르마를 매입하려는 구단주와 기업은 나타나지 않았다. 당시 약 1억9000만유로(한화 약 2400억원)까지 불어난 부채가 문제였다. 결국 파르마에게는 ‘Associazione Calcio Parma’라는 구단명을 포기한 채 ‘파르마 칼치오 1913’이라는 명칭으로 재창단한 후 세리에D에서 시작하는 방법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2017-2018시즌 세리에B 최종전에서 승리한 후 감격을 누린 파르마 칼초 1913. 2014-2015시즌을 끝으로 4부 리그에 강등 당한 후 3연속 승격이라는 기적을 써내며 4년 만에 세리에A 복귀에 성공했다. /사진= 파르마 공식 트위터

◆기적의 3연속 승격, 그 중심엔 ‘전설’과 ‘팬’이 있었다.
2015-2016시즌 4부리그에서 출발한 파르마의 미래는 암담해 보였다. 그러나 위기의 팀을 구하기 위해 전성기를 이끈 인물들이 뭉치기 시작했다. 1994-1995시즌 구단 역사상 첫 유로파리그(당시 UEFA컵) 우승을 이끌며 전성기를 구가한 네비오 스칼라가 회장으로 취임했으며 약 13년간 파르마에서 수비수로 활약했던 루이지 아폴리니가 감독으로 선임됐다.

충성스러운 팬들 역시 팀을 떠나지 않았다. 파르마의 팬들은 그들의 마지막 세리에A 시즌보다 세리에D에서 더 많은 티켓을 구매했다. ‘십자군(파르마의 애칭)’의 일원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자체적으로 크라우드펀딩까지 진행하면서 팀의 재건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들의 성원에 힘입어 파르마는 해당 시즌을 무패로 마쳤을 뿐 아니라 세리에D 역대 최고 승점을 기록하면서 3부리그인 레가 프로로 단숨에 올라선다.

레가 프로에서의 초반은 험난했다. 연패가 이어지면서 아폴리니 감독이 해임되고 현재까지 파르마를 이끌고 있는 로베르토 다브레사가 신임 감독으로 선임됐다. 이탈리아 하부리그 비르투스 란차노를 3년간 이끌었던 경력이 전부였던 초짜 감독은 파르마를 최종 2위까지 올려놓았다.

이후 플레이오프에서 피아첸차와 루체, 그리고 포르데노네를 연이어 격파한 파르마는 팀의 전설적인 공격수 에르난 크레스포가 지켜보는 가운데서 알레산드리아를 2-0으로 물리치면서 간신히 세리에B에 진출했다.

연이은 승격 소식은 새로운 투자자를 끌어들였다. 파르마 부흥에 흥미를 느낀 중국인 사업가 장 리장은 파르마 지분 60%를 사들이면서 새로운 구단주로 취임했고 크레스포를 부회장으로 앉혔다. 장 리장은 취임 당시 “파르마는 다시 일어설 것이고 팬들과 함께 조만간 세리에A로 복귀하기를 희망한다”며 소감을 밝혔다.

그의 발언은 얼마 후 현실이 됐다. 본래 세리에B 최종전을 앞둔 파르마의 승격 전망은 다소 어두웠다. 당시 승점 69점 3위로 플레이오프 권에 위치한 파르마는 최종전에서 승리함과 동시에 2위인 프로시노네(승점 71점)가 포지아에게 패배해야 세리에A 직행이 가능했다.

시즌 종료 5분 전까지 프로시노네가 포지아에 2-1로 역전에 성공하면서 파르마가 치열한 플레이오프를 뚫어야 하는 운명에 처한 것은 당연해 보였다. 그러나 기적이 일어났다. 경기 종료 1분 전 포지아의 로베르토 플로리아노가 극적인 동점골을 넣은 것이다. 해당 경기는 그대로 2-2로 끝나면서 스페치아를 2-0으로 물리친 파르마가 세리에A 진출을 확정지었다.

3연속 승격으로 세리에A에 진출한 사례는 이탈리아 역사를 통틀어 처음있는 ‘기적’이었다. 그리고 이 놀라운 역사의 또 다른 주역에는 팀의 전설적인 수비수 알렉산드로 루카렐리가 있었다.

2014-2015시즌 팀이 4부 리그로 강등당한 당시, 대부분의 1군 선수들은 타팀으로 이적했다. 그러나 루카렐리만큼은 파르마에 남았다. 당시 루카렐리는 “파르마가 원한다면 나는 세리에D에서도 파르마를 위해 뛸 준비가 돼 있다. 내 심장이 시키는 대로 파르마에 남는다”라는 말과 함께 주장으로서 팀을 이끌었다.

4년 만에 감격스러운 1부 리그 복귀를 이룬 루카렐리는 최종전 이후 “믿을 수 없다. 불가능했다. 우리는 3년간 놀랄만한 업적을 이뤄냈다. 누구도 이와 같은 결말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며 “나는 3부리그 승격 당시 파르마를 세리에 A로 다시 데려갈 것이라고 약속했고 그 약속을 지켰다. 이제야 은퇴할 수 있게 됐다”고 기적의 승격을 일군 소감을 밝혔다.

루카렐리는 지난 5월27일(한국시간) 은퇴를 선언했다. 이에 파르마 구단은 해당 팀에서 총 348경기를 뛰며 팀을 두 번이나 세리에A 승격으로 이끈 ‘전설’을 예우하면서 그의 등번호 6번을 영구 결번했다. 그는 은퇴 후에도 파르마 소속 매니저로 팀과 함께하고 있다.

파르마에서만 10시즌 동안 총 348경기를 뛰며 활약한 알렉산드로 루카렐리. 팀이 파산으로 4부 리그까지 추락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잔류해 극적으로 세리에A로 복귀시킨 '전설'이다. /사진=로이터

◆리그 6위와 승점 1점차, 기적은 '현재진행형’
이번 시즌 15라운드까지 진행된 현재 파르마는 6승 3무 6패 승점 21점으로 선전하고 있다. 시즌을 앞두고 장 리장의 자금을 앞세워 무려 20여명의 선수를 영입한 효과를 본 것이다.

특히 코트디부아르 축구 대표팀과 AS 로마, 아스날에서 활약한 제르비뉴는 리그 9경기 동안 5골을 넣으며 활약하고 있다. 지난 2일(한국시간) 밀란전에서 부상을 당해 약 4주간 결장한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여기에 나폴리에서 영입된 로베르토 인글레세도 4골 1도움으로 힘을 보태고 있으며 포르투갈 대표팀에서 '유로 2012 4강', '유로 2016 우승'에 기여한 베테랑 센터백 브루노 알베스도 팀의 중심을 잡아주고 있다.

기대 이상으로 놀라운 활약을 펼치고 있는 선수는 골키퍼 루이지 세페다. 2011년 나폴리에 입단한 세페는 이후 주전 자리를 확보하지 못하면서 비르투스 란시아노와 엠폴리, 피오렌티나 등에서 임대 활동을 이어갔다. 그리고 이번 시즌 파르마로 둥지를 튼 세페는 환상적인 선방 쇼를 펼치며 팀의 수호신으로 자리잡았다.

축구통계매체 ‘스쿼카’에 따르면 이번 시즌 세페는 15경기 동안 무려 62번의 세이브를 기록했다. 경기당 4.13개에 달하는 세이브 성공 개수는 이번 시즌 87.5%로 유럽 최고의 선방률을 기록 중인 삼프도리아의 아우데로(3.27개)는 물론, 세리에A 정상급 골키퍼인 사미르 한다노비치(3.2개)와 잔루이지 돈나룸마(2.33개)를 훌쩍 뛰어넘는 수치다.

개막전에서 팔레르모와 2-2 무승부를 기록한 파르마는 스팔2013과 유벤투스에 연이어 패하며 17위에 그쳤다. 그러나 이후 인터밀란과 엠폴리를 연이어 잡아내며 반전을 만든 파르마는 이 두 경기를 포함해 12경기 동안 6승 2무 4패를 기록했다.

13라운드 당시 리그 6위까지 순위를 끌어 올린 파르마는 가장 최근 경기인 밀란전과 키에보 베로나전에서는 1무 1패에 그치며 잠시 주춤한 상태다. 그러나 파르마는 이미 팬들과 선수, 구단 모두가 ‘기적’을 일으킨 경험이 있는 만큼 새롭게 활약 중인 선수들과 함께 또 한번의 역사를 만들어내는 것도 기대해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