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ID카드 광고_사진=유튜브 캡처

저 멀리 푸른 초원 위로 아르데코풍 호텔이 높게 서 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이상적인 휴양지를 배경으로 호텔 지배인의 독백이 시작된다.

"저희 손님의 취향은 다양합니다. 그렇다면 여기 산신령의 방은 어떨까요."


케리어를 들고 지배인의 안내에 따라 방에 들어간 산신령은 자신의 취향에 딱 맞는 방에 감탄한다.

"산신령님은 콘텐츠를 좋아하시는군요. 요즘 챙겨볼 거 참 많죠."

내레이션이 끝나기도 전에 TV를 켠 산신령은 금세 울고 웃고 놀라고 분노하며 OTT(Over The Top, 인터넷 기반 TV서비스)에 빠져든다.
한편 금도끼·은도끼 잘 나오는 연못에 도착한 나무꾼은 연못에 도끼를 빠뜨리지만 '이 도끼가 니 도끼냐'며 나타나야 할 산신령은 어디가고 던졌던 도끼만 도로 튀어나온다. 연못 주인이 일하기 싫은 듯. 생각해보니 좀 전의 산신령이 이 연못의 주인이고 그는 지금 휴가 중이다.


삼성ID카드 광고_사진=유튜브 캡처
이 사실을 알 리 없는 나무꾼은 멍하니 연못만 바라보는데 그 옆으로 불고기 버거 라지세트가 도착하자 여지껏 코빼기도 안 보이던 산신령이 직접 연못 밖으로 나와 버거세트를 받는다. 그는 나무꾼이 연못에서 자신을 기다리든 말든, 자신의 방에 도끼가 쌓이든 말든 OTT에만 열중한다.
어둑해진 초원과 삼성ID카드로 변한 호텔이 보이고 그 옆으로 "내 취향 알아서 할인"이란 카피가 나오면 시청자는 이제 광고가 끝났다고 생각할 것이다.
끝날 듯 끝나지 않는 네버엔딩스토리
하지만 광고는 이제 시작이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연못 밖에 쪼그리고 앉아 하염없이 산신령을 기다리던 나무꾼은 연못 속에서 흘러나오는 내레이션에 귀를 기울이다 "뭐라고? 광고하고 있는 거야?"라며 어이없어하고 그 뒤로 다시 3개의 삼성ID ON카드를 배경으로 "삼성ID ON카드"라는 카피가 나온다.

시청자는 이제 정말 광고가 끝나겠거니 생각하지만 광고는 다시 화가 난 나무꾼이 도끼를 집어 던지고, 집어 던진 도끼가 상품홍보 글이 새겨진 그루터기에 날아가 박히는 모습을 보여주며 또다시 이어진다. 곧이어 산신령이 골프를 치면 '골프 할인 혜택', 커피를 마시면 '커피 할인 혜택', 여행 짐을 싸면 '여행 할인 혜택'이란 카피가 뜨고 마지막으로 나무꾼의 황당한 표정을 배경으로 삼성카드 로고가 나온 후에야 광고는 정말로 끝이 난다.

삼성ID카드 광고_사진=유튜브 캡처
금도끼·은도끼를 살짝 비튼 이야기에는 기존 광고처럼 눈에 확 들어오는 강렬하고 확실한 메시지가 없다. 혜택이 많다는 것은 알겠지만 이야기의 결론이 누구나 휴가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건지 나무꾼처럼 횡재를 바라선 안된다는 건지 아리송하다.
확실한 것은 마치 영화 크레딧 뒤에 나오는 쿠키 영상 같은 이야기들이 하나둘 이어지며 깨알 같은 재미를 선사한다는 점이다. 그닥 새롭지 않은 뻔한 이야기들이지만 이 이야기들이 끝날 듯 끝나지 않고 이어진다는 점이 또 하나의 웃음포인트이자 홍보포인트인 셈이다.
미디어 변화가 가져온 스토리텔링의 변화
산신령 외에도 준비된 에피소드는 많다. 도로시와 친구들은 삼성ID카드로 대중교통요금을 할인받으며 녹색마녀를 찾아가고 한석봉은 이태원에서 놀다 어머니에게 들킨 후 교육비를 할인받아 하버드에 입학한다. 외계 로봇은 치솟는 유가에 변신조차 버거워하다 기름값 할인으로 세계 정복의 꿈을 다시 키운다.

각 에피소드는 지구 침공을 계획하는 외계 로봇에게 기름값 할인 혜택을 약속하는 카드사처럼 가볍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문제들을 아주 가볍게 이야기한다. 예전처럼 짧고 굵게 '한 방'을 노리는 이야기, 소비자의 눈과 귀를 사로잡을 만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잔잔하게 계속해서 볼 수 있는 이야기, 소소하지만 다음이 궁금해지는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 속에 상품소개를 녹이는 건 덤이다.

삼성ID카드 광고_사진=유튜브 캡처
이러한 변화는 시청자의 유머코드가 바뀐 탓도 있지만 시간 제약이 없는 온라인 광고의 특성 때문이기도 하다. 텔레비전 광고는 그 파급력에 비해 시간에 제한이 있고 송출할 수 있는 광고 수에도 제한이 있다. 보통 시청률 높은 황금시간대가 15초에 1500만원 선인데 하루 1번 한 달 동안 광고를 집행한다면 4억5000만원이 든다. 낮 12시~오후 4시 사이 시청률이 낮은 시간대도 15초에 110만원, 한 달 3300만원 수준이다. 기존 광고가 짧고 강하게 압축적으로 제작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반면 온라인 광고는 종류와 방식에 따라 다르긴 해도 15초 광고를 1만명이 봤을 경우 20만원이 채 안 든다. '건너뛰기' 5초 전에 시청자의 눈을 사로잡을 수만 있다면 그 뒤로는 30초나 3분짜리 광고도 큰 부담 없이 보여줄 수 있다. 시청자의 손가락만 잡아둘 수 있다면 공중파 광고에서는 할 수 없었던 것, 하고 싶었던 것들을 마음껏 보여줄 수 있다. 한 번 보면 끝까지 보게 되는 광고를 만드는 이유, 시청자에게 기억될 수만 있다면 문맥과 상관없이 옴니버스식으로 에피소드들을 이어 붙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청자는 이야기에 굶주려 있다. 하지만 재미없는 본편을 볼 바엔 재미있는 광고를 선택하는 것이 요즘 시청자다. 거창한 무엇을 위해 현재를 참기보다 지금 당장의 소소한 즐거움을 찾는다. 전통적인 ATL(Above the line, 매스미디어 광고)과 BTL(Below the line, 신문·잡지·옥외광고) 대신 TTL(Through the line, 소셜미디어·온라인 광고)이 뜨는 이유기도 하다. 언젠가 재미있는 볼거리가 나오길 기다리며 무작정 화면만 쳐다볼 필요 없이 화면 속 버튼만 누르면 지금 당장 나만의 즐거움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광고크리에이터도 거창한 주제, 탄탄한 콘셉트, 획기적인 아이디어와 반전을 고민하기보다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 각자의 다양한 이야기를 발굴하고 각색하는 데 더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동전의 양면처럼 일장일단이 있는 세계에서 무엇이 옳다 그르다 판단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즐거움의 기준, 스토리텔링의 방식이 변화하고 있다는 점만큼은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