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해군 소속 정찰함 푸에블로호가 북한 원산 앞 공해상에서 북한 해군에 의해 나포돼 82명의 미 해군 인원이 11개월이나 붙잡혀 있다가 풀려났다. 사진은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1968년 1월23일 발생한 '푸에블로호' 억류 사건을 재조명하며 공유한 7명의 결사대원 모습. /사진=뉴스1(평양 노동신문)
1968년 1월23일 미 해군 소속 정찰함 푸에블로호가 북한 원산항 앞 공해상에서 북한 해군초계정에 나포됐다. 푸에블로호에는 민간인 과학자 2명, 장교 6명을 포함해 모두 83명의 승무원이 타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북한군의 발포로 승조원 1명이 사망하고 13명이 다쳤다.
미 함정이 공해상에서 납치된 사건은 미국 역사상 106년만에 처음이었다.
906t급 푸에블로호, 북한 공격받고 강제 나포돼
미 해군 소속 정찰함인 푸에블로호는 일본에서 출발해 소련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하는 임무를 하달받고 북한 동해안에서 정보를 수집할 목적으로 한반도로 향했다. 푸에블로호는 경화물선을 개조한 해군 정보수집함으로 무게 906t, 길이 54m, 폭 10m, 속도 12.2노트다. 당시 장교 6명, 사병 75명, 민간인 과학자 2명 총 83명을 태우고 있었다.

사건 당일 오후 1시45분(한국시각) 북한의 초계정은 푸에블로호로 다가가 국적을 밝히라고 요구했다. 푸에블로호가 '미국'이라 답하자 북한 함정은 "정지하지 않으면 발포하겠다"고 위협하며 정선을 요구했다. 푸에블로호는 공해상에 있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북한은 약 1시간 뒤 3척의 무장 초계정과 2대의 미그기를 내보내 푸에블로호를 포위해 그대로 나포했다. 이 과정에서 승조원 1명이 사망하고 13명이 다쳤다.

그렇게 푸에블로호는 오후 2시42분 "엔진이 모두 꺼졌으며 무전 연락도 이것이 마지막이다. 원산항으로 끌려간다"는 최종보고를 송신하고 끌려갔다.
사진은 평양 보통강변에 전시된 미 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 /사진=CNN
미국의 굴욕, 북한의 '승리' 선전… 한반도 휘감은 전운
이 사건이 발생하자 미국은 즉각 핵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와 3척의 구축함을 원산만 부근에서 대기하도록 하고, 함정과 승무원들을 즉각 석방하도록 소련을 통해 접촉했다. 이어 25일에는 해공군의 예비역 1만4000여명에게 긴급 동원령을 내리고 전투기를 비롯한 항공기 372대에 대한 출동 태세를 갖추도록 했다. 오산과 군산기지에 2개 전투기대대를 급파하는 등 군사적 조치를 위해 나갔다. 또 28일에는 2척의 추가 항공모함과 구축함 1척, 6척의 잠수함을 동해로 이동시키면서 한반도에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결국 이 사건은 30여 차례의 비밀 회담을 통해 납치된 승무원 82명과 유해 1구가 325일 만인 1968년 12월23일 판문점을 통해 귀환함으로써 마무리됐다. 당시 미국은 국내 반전 여론 때문에 베트남전 철수를 고려하고 있는 시기여서 한반도의 긴장 상태를 원치 않았다. 이 때문에 미국은 북한 영해 침범을 사과하는 문서에 서명하는 등 많은 양보를 하면서 협상했다. 다만 푸에블로호 선체는 반환 대상에서 제외됐다. 이 배는 1991년까지 원산항에 있었으나 김정일 지시에 의해 1999년 10월 대동강 '충성의 다리' 근처로 옮겨져 반미교육으로 활용되고 있다.
사진은 미국 푸에블로호를 나포한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 강사 박인호의 수기가 실린 북한 잡지. /사진=월간지 '조선' 1월호
미 법원, '푸에블로호 나포' 북한에 2.5조원 배상 판결… "역대 최대"
당시 북한에 억류됐던 푸에블로호 승무원들은 북한에 납치됐던 11월간 상습적인 구타, 고문, 영양실조 등으로 혹사당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많은 승무원이 미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심각하고 지속적인 또는 영구적인 신체 부상, 결함, 정신적 피해를 봤다"고 호소했다.
윌리엄 토마스 매시 등 당시 승조원 4명은 2006년 북한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9700만달러의 승소 판결을 받았고, 2021년 다른 승조원과 가족, 유족 등 171명은 북한의 23억달러 배상 책임을 인정받기도 했다.

2021년 당시 미국의소리(VOA) 방송은 이번 배상 규모가 역대 미 법원이 명령한 북한의 배상액 중 가장 큰 액수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