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18일 신군부 세력에 반발한 광주 시민들이 거리로 나섰다. 사진은 1980년 당시 광주광역시 모습. /사진=뉴스1(5·18 민주화운동기록관 제공)
1980년 5월18일 광주광역시(당시는 직할시) 거리는 민주주의를 외치는 시민들의 함성으로 가득했다.

당시 서울 대학가에서는 '서울의 봄'이라 불릴 만큼 민주화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졌으나 실상은 반대로 흘렀다. 1979년 12·12 군사반란으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신군부는 1980년 5월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모든 정치 활동을 금지했다.
총칼로 무장한 계엄군, 그에 맞선 광주시민… 민주주의를 외치다
군부를 장악한 신군부는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을 포함한 정치인과 재야인사 수천명을 감금하고 국회를 봉쇄했다. 이후 서울 대학가에서는 이를 규탄하기 위한 집회가 시작됐으나 학생 시위는 무력으로 진압됐다.


5월18일 광주에서도 격렬한 항거가 시작됐다. 전남대학교 앞에서 시작된 시위는 곧 시민들의 참여로 번졌고 신군부는 11공수여단 병력을 투입해 이를 진압했다. 공수부대원은 운동권 학생뿐만 아니라 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무고한 시민까지 살상하고 폭행했다. 곤봉과 총검으로 무장한 병력에 맞선 시민들은 점차 조직적인 저항에 나섰고 시위는 도시 전역으로 확산했다.

며칠간의 충돌 끝에 5월21일 계엄군은 시위대를 향해 도청 앞에서 울려 퍼지는 애국가에 맞춰 집단 발포를 감행했다. 이날은 5·18 민주화운동의 분수령이 됐다.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하면서 시민들은 생존을 위한 저항자로 나서게 됐다. 결국 시민들은 무기고에서 무기를 확보해 무장했고 계엄군은 같은 날 시내에서 철수하며 도시는 일시적으로 시민군의 통제 속에 놓였다.

그러나 평온은 오래가지 않았다. 광주의 진실은 중앙 언론에 의해 철저히 차단되거나 왜곡됐고 정부는 이를 '폭도들의 반란'이라 주장했다. 고립된 광주는 다시 계엄군의 폭력에 휘말렸다. 5월27일 새벽 계엄군은 탱크와 중화기로 무장한 채 도청 진입 작전을 개시했다. 마지막까지 도청을 사수하던 시민군은 거의 전멸했고 광주는 다시 철저한 통제 아래 들어갔다. 공식 사망자 수는 163명이지만 당시 실종자와 부상자, 정신적 트라우마를 입은 이들까지 포함하면 피해 규모는 수천명에 달했다.
45년 전 5월18일 광주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는 시민들의 함성이 계엄군의 총칼과 맞섰다. 사진은 5·18 민주화운동 당시 상무관 희생자의 관위에 놓인 태극기와 광주시민들 모습. /사진=뉴스1(5·18 민주화운동기록관 제공)
뒤늦게 알려진 광주의 진실… 45년이 지나도 고통 속에 사는 시민들
이 참상은 독일 제1공영방송 ARD의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에 의해 알려졌다. 그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과 그 참상을 세계에 처음으로 공개했다. 이는 국제 사회의 압박과 국내 민주화 세력의 여론 형성에 영향을 주었고 민주화 흐름에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광주의 진실은 시간이 흐른 후에야 조금씩 드러났다. 1988년 국회 청문회를 시작으로 1995년에는 '5·18 특별법'이 제정됐고 전두환과 노태우는 내란죄 및 반란죄 혐의로 기소됐다. 법원은 이들에게 무기징역과 수천억원대 추징금을 선고하며 역사적 책임을 물었다.

하지만 45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5·18 민주화운동을 경험한 이들 중 상당수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앓고 있다. 오수성 전남대 교수 연구진은 5·18 유공자 중 부상자와 구속자는 정당한 이유 없이 신체적, 정신적 상해를 입은 성폭행 피해자나 난민, 고문 피해자 등 인권 유린 피해자와 유사한 경험을 해 상당수가 PTSD 증상을 호소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