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동작구 오피스텔에 거주하는 34세 직장인 이종윤(가명)씨는 인터뷰 내내 수차례 '현타'라는 표현을 썼다. 그에게 현타란 열심히 살면 보상이 따를 것이라는 신념이 부질없어지는 순간을 의미했다. 사진은 서울 동작구 오피스텔에 거주하는 34세 직장인 이종윤(가명)씨의 모습. /사진=김성아 기자
서울 동작구 오피스텔에 거주하는 34세 직장인 이종윤(가명)씨는 인터뷰 내내 수차례 '현타'라는 표현을 썼다. 현실 자각 타임. 그에게 현타란 열심히 살면 보상이 따를 것이라는 신념이 부질없어지는 순간을 의미했다. 인터뷰 내내 내쉬던 그의 한숨에는 무주택 청년이 '집값 폭등 시대'를 살아가며 느끼는 구조적 한계와 깊은 허탈감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이씨는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 현재는 서울 강남구 소재 외국계 IT(정보통신) 기업에 다니고 있다. 올해로 사회생활 4년 차, 월 수입은 400만원 수준이다. 부모에게서 큰 자산을 물려받은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경제적 지원은 가능한 편이다. 스스로는 '평범한 직장인'이라고 여기지만 남들 눈엔 '은수저'쯤으로 부러움을 살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작 이씨는 "유독 '집' 앞에서는 계속 막막한 느낌"이라고 털어놨다. 그는 "열심히 살면 결혼하고 아이 낳고 차 사고 집도 사면서 평범하게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이제는 꿈조차 꾸기 어려운 일이 돼버렸다"고 토로했다.
근로소득으론 집 못 산다…'운발사회' 체감한 30대 직장인의 고백
부동산 자산 가치 상승폭이 임금 상승폭의 약 4배에 달하는 상황에서 부동산은 '노력'보다 '출발선'이 중요하다는 자각은 이제 청년들 사이에서 당연한 현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사진은 지난 3월 서울 송파구의 한 부동산 단지 앞으로 시민들이 지나가고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
집값이 걷잡을 수 없이 치솟은 탓이다. 지난 3월 기준 서울 아파트 평균 매매가는 약 13억원, 경기는 약 5억3000만원이다. 단순 계산으로 월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두 저축한다고 해도 서울에서 내 집 한 채를 마련하는 데는 22년, 경기는 9년 넘게 걸린다. 이씨는 "월세·식비·보험·교통비 등 고정지출을 고려하면 사실상 '노동만으로는 수도권에서 집을 가질 수 없는 구조'"라고 단언했다.

현실은 이보다 훨씬 가혹하다. 아무리 아껴가며 임금을 차곡차곡 모아도 몇십배 빠른 속도로 치솟는 집값을 따라잡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 초기인 2017년 3519만원이었던 근로자 1인당 평균 급여는 지난해 4332만원으로 23% 늘어나는 데 그쳤다. 같은 기간 전국 아파트 평균 매매 가격은 2억8000만원에서 5억2000만원으로 85%나 급등했다. 자산 가치 상승폭이 임금 상승폭의 약 4배에 달한다.

부동산은 '노력'보다 '출발선'이 중요하다는 자각은 이제 청년들 사이에서 당연한 현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수억원대 자산을 물려받은 금수저이거나 부모의 지원 덕에 교육을 잘 받아 매달 수백만원의 이자를 감당할 수 있는 고소득 정규직이 된 경우가 아니면 수도권에서 내 집 마련은 쉽지 않아서다. 집값이 오를수록 이씨처럼 소득은 있지만 자산은 없는 중산층 무주택자들의 박탈감도 커진다. 이씨는 '근로소득만으로는 집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체감하게 되면서 '인생은 운발'이라는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했다.


청년들이 집값 부담에도 불구하고 수도권을 떠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단연 '일자리'다. 이씨도 지방 이전을 고민해 본 적은 있지만 여러 현실적 제약 앞에 결국 서울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수도권 바깥으로 나가는 것도 생각은 해봤지만 지금 회사가 서울에 있고 출근을 해야 하니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연봉이나 복지 수준도 지방과는 격차가 커 일자리의 질과 기회 자체가 서울에 집중돼 있다는 걸 체감했다" 또 그는 "평생 서울에서 살았고 생활 반경도 대부분 이곳에 있는데 생계, 커리어, 인간관계를 모두 두고 낯선 지방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도 덧붙였다.

급등한 집값은 청년층의 욕망을 자극하는 동시에 조바심과 불안을 키웠다. 사진은 지난해 6월 서울의 한 시중은행에 주택담보대출 관련 현수막이 걸려 있는 모습. /사진=뉴스1
급등한 집값은 청년층의 욕망을 자극하는 동시에 조바심과 불안을 키웠다. 누구는 아파트 한채로 '인생 역전'을 했다는 성공담을 들려주고 누구는 기회를 놓쳐 씁쓸한 실패담을 전한다. 이처럼 부동산을 둘러싼 양극단의 경험은 청년들 사이에서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은 대출), '빚투'(빚내서 투자) 같은 단어를 일상어로 만들었다.

이씨는 "집값이 나날이 치솟으면서 지금 집을 사지 않으면 평생 기회가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 생긴다"고 말했다. 이어 "저축만으로는 부동산을 살 수 없다는 걸 모두 알고 있어서 주변 친구들도 이제는 거의 포기한 분위기"라며 "오히려 그런 불안 때문에 비트코인이나 주식에 더 과감하게 뛰어드는 경우가 많다"고 덧붙였다.
"무분별한 공급만으론 부족하다"

이씨는 서울 집값은 절대 떨어지지 않는 '불패 신화'가 이어진다면 결국 부모 자산과 안정된 일자리를 가진 상위 10% 청년층에게만 부가 집중되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고도 우려했다. 사진은 지난 4월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관계자들이 서울 종로구 경실련에서 윤석열 정부 3년동안의 서울 아파트의 시세를 분석 발표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
오는 6월3일은 조기 대선일이자 '무주택자의 날'이다. 1992년 주거 연합이 주거권 보장을 외치며 이 날을 선포한 지 30여년이 지났지만 집 없는 서민들의 고통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무엇보다 '주거'는 생존과 직결된 문제임에도 이번 대선에서도 무주택자의 눈높이에 맞는 정책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이씨는 대선 후보들의 부동산 공약에 대해서 비판적 입장을 보였다. "전체적으로 너무 실망스럽다"고 평가한 그는 "'공공분양'이나 '신도시 개발' 같은 익숙한 용어들은 반복되지만 어떻게 실행할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과 재원 마련 방식은 빠져 있다"고 지적했다.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가 제시한 '3·3·3 청년주택' 공약에 대해서는 "청년층을 겨냥한 정책으로 마음에 들지만 정책 설계의 구체성이 부족해 실현 가능성이 낮아 보인다"고 비판했다. 이 공약은 결혼, 출산, 둘째 출산 시 3년 동안 주거비를 지원하는 조건으로 청년 주택을 공급하겠다는 내용으로 임기 내 50만가구 공급을 목표로 한다. 하지만 연간 10만가구에 달하는 물량을 실현할 구체적 실행 계획은 아직 제시되지 않았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강조한 '4기 신도시 개발' 등 공급 확대 정책에 대해서도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이씨는 "4기 신도시 같은 대형 개발 사업은 토지 보상, 인허가, 기반시설 조성 등을 고려하면 실제 입주까지 10년 이상 소요될 가능성이 높고 정권이 바뀌면 추진 동력이 약화될 수 있다는 불안도 있다"고 말했다. 또 이 후보는 이번 대선에서 수원·용인·안산·인천 등 노후 계획도시 정비 등을 통한 공급 확대를 약속했지만 2022년 대선에서 제시한 '311만 가구 공급'과 달리 공급 물량과 일정을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는 점도 지적했다.

무엇보다 이씨는 "공급만 늘린다고 주거 불안이 해소되는 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지금은 수도권에 집 한채 없으면 인생이 실패한 것처럼 여겨지는 분위기"라며 "그런 자괴감을 줄이려면 단순히 물량을 늘리는 데 그칠 게 아니라 투기 수요 차단, 공공임대 확대, 실질적인 집값 안정 방침 등의 정책도 함께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이씨는 집값이 고공행진을 이어가면서 청년층 사이에서도 자산 양극화가 빠르게 심화되고 있다는 점도 짚었다. 부동산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의 격차는 더 이상 세대 간 불균형에 그치지 않고 같은 세대 내부의 계급을 나누는 기준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전국 20~30대 인구 가운데 아파트를 소유한 비율은 약 11%에 불과하다. 이씨는 "2030세대 내부에서도 자산 격차가 뚜렷해지는 구조"라며 "한쪽은 부모의 자금 지원과 고소득 직장을 바탕으로 부동산을 취득해 자산을 불리고, 다른 한쪽은 월급만으로는 치솟는 집값을 따라잡는 것조차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제는 같은 세대 안에서도 주택 보유 여부가 새로운 계급 구분선이 되고 있다"고 했다.

이에 이씨는 "대선 후보들에게 정말로 묻고 싶은 것은 지금의 불평등 구조를 바꿀 의지가 실제로 있느냐는 것"이라며 "무주택자에게 필요한 건 '내 집 마련'이라는 실질적 희망이지 도달할 수 없을지도 모를 '공급 계획'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