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엔 스테이블코인 발행사들이 준비금을 미국 국채 등 실물 자산 중심으로 운용하면서 자산시장과의 연결성도 강화되고 있다. 이에 따라 글로벌 주요국들은 제도권 편입을 전제로 한 규제 정비에 본격 착수했고 국내에서도 뒤늦게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재조명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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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화된 현금'… 실물 자산에 연동된 암호자산━
스테이블코인은 미국 달러나 유로, 엔 등 실물 화폐에 1대1로 가치를 고정한 디지털 자산이다. 발행사는 달러, 국채 등 실물 준비금을 보유한 뒤 이를 담보로 토큰을 발행해 실시간 거래·송금·결제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한다. 대표적인 스테이블코인인 USDT(테더)와 USDC(서클)는 글로벌 암호화폐 거래소 거래량의 9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사실상 '기축통화' 역할을 하고 있다.스테이블코인 시장은 지난해 완만한 회복세를 이어가다 트럼프 대통령 당선 이후 정책 기대감에 힘입어 성장 동력을 확보했다. 특히 지난해 12월 최초의 스테이블코인인 'BitUSD' 출시 10주년을 맞은 시점에서 시장 전체 시가총액이 처음으로 2000억달러(약 275조원)를 돌파했다. 지난 12일 기준 시총은 2429억달러(약 334조원)로 집계되며 연초 대비 19%, 전년 동기 대비 51% 증가했다.
스테이블코인이 부각되는 이유는 디지털 경제 전환과 기존 금융 시스템의 구조적 한계 때문이다. 현금 사용은 빠르게 줄어들고 있고 온라인 결제와 간편 송금이 일상화되면서 실물 화폐를 대체할 디지털 기반의 안정적 거래 수단에 대한 수요가 커지고 있어서다.
기존 은행 시스템의 높은 수수료, 송금 지연, 금융 소외 문제 등도 스테이블코인 필요성에 힘을 싣는다. 이 같은 환경 속에서 스테이블코인은 블록체인 기반의 '디지털 달러'로 기능하며 실물 화폐의 한계를 보완하는 새로운 인프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은 구조에 따라 ▲법정화폐 담보형 ▲암호자산 담보형 ▲알고리즘형 세 가지로 구분된다. 법정화폐 담보형은 가장 일반적인 형태로 미국 달러 등 실물 화폐를 준비금으로 보유한 후 이를 기반으로 토큰을 발행한다. USDT와 USDC가 대표적이며 상대적으로 가격 안정성과 규제 수용성이 높다. 다만 발행사의 회계 투명성과 중앙화 리스크는 여전히 우려 대상이다.
암호자산 담보형은 이더리움 등 디지털 자산을 초과담보 형태로 맡기고 스마트 계약을 통해 발행된다. 대표 사례는 DAI(MakerDAO)이며 탈중앙화 수준이 높다는 장점이 있지만 담보 자산의 급격한 가격 변동 시 청산 위험이 존재한다. 알고리즘형은 별도 담보 없이 수요·공급 조절 알고리즘으로 가격을 유지하는 구조다. 테라USD(UST)가 대표적이었으나 2022년 붕괴 사례 이후 가장 고위험 구조로 분류된다. 최근에는 알고리즘과 담보 방식을 혼합한 Frax(FRAX) 같은 하이브리드형도 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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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래소에서 송금까지…실사용성 넓히는 스테이블코인━
국제 송금 및 결제 인프라로도 활용도가 높다. 기존 금융시스템 대비 낮은 수수료와 빠른 처리 속도로 글로벌 기업이나 개발도상국 내 급여 지급, 공급망 결제, P2P 송금 등에서 확산 중이다. 미 달러 접근성이 떨어지는 지역에선 사실상 '디지털 달러'로 기능하고 있다.
디파이 시장에서는 예치, 담보대출, 유동성 공급, 결제 수단 등 금융 서비스의 기반 자산으로 쓰인다. 중앙기관 없이도 금융 기능을 수행할 수 있어 금융 포용성 확대 수단으로도 주목받는다.
정유신 서강대 경영학과 교수 겸 디지털경제금융연구원장은 "스테이블코인이 본격적으로 대중화되면 송금이나 입금, 무역 대금 결제 등 자금 이동이 훨씬 간편해질 것"이라며 "수수료나 처리 시간 측면에서도 기존 외환 거래보다 훨씬 효율적이기 때문에 국경 간 거래가 일상화된 환경에서 큰 장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해외에 나갈 때 달러로 환전하거나 외화를 따로 준비할 필요 없이 디지털 지갑에 담긴 스테이블코인만으로 실시간 결제가 가능해질 수 있다"며 "장기적으로는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도 기대해볼 수 있는데, 그렇게 되면 디지털 환경에서의 원화 사용성과 확장성도 한층 커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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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이블코인 자본시장 편입 움직임 본격화 ━
글로벌 규제 당국은 스테이블코인을 자본시장으로 편입하려는 움직임을 본격화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은 세계 최초로 스테이블코인을 규율한 MiCA(암호자산시장 규제)를 발효했고 일본은 은행 등 금융기관만 발행을 허용한다. 미국은 테더, 서클 등 주요 발행사를 '시스템 중요성 금융기관'(SIFI) 수준으로 보고 발행 정보 실시간 공시, 준비금 투명성 확보 등을 골자로 한 입법을 추진 중이다.민주당의 맷 카르트라이트 의원이 발의한 '지니어스 법안'(GENIUS Act)은 스테이블코인을 사실상 MMF(머니마켓펀드)로 분류해 자본시장 규제를 적용하려는 시도로 평가받는다. 회계 정보 공시, 증권성 판단 등 증권거래위원회(SEC)와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의 감독 권한도 포함돼 있다. 반면 한국은 아직 제도화 움직임이 본격화되지 않은 상태다. 디지털자산 기본법 초안에도 스테이블코인 항목은 포함되지 않았고 대부분 일반 암호자산과 동일 기준으로 분류되고 있다.
국내는 아직 디지털자산 기본법 초안조차 스테이블코인 관련 항목이 빠져있고 대부분 일반 암호자산과 동일한 틀로 분류되고 있다. 금융당국도 제도화 가능성을 시사했지만 구체적인 로드맵은 제시되지 않은 상태다.
이런 가운데 정치권과 업계 중심으로 스테이블코인 활성화에 대한 논의가 뒤늦게 본격화되는 분위기다. 특히 토큰증권(STO)을 비롯한 디지털자산 기반 상품들이 금융투자상품으로 빠르게 편입되면서 스테이블코인을 둘러싼 제도·기술·정책 측면의 검토 작업도 물밑에서 진행 중인 분위기다.
최근에는 정치권이 직접 스테이블코인 제도화 논의에 나서며 제도화 논의에 속도가 붙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지난 27일 국내 5대 가상자산 거래소 대표들과 닥사(DAXA, 디지털자산거래소 공동협의체) 관계자들을 만나 스테이블코인 도입 및 활성화를 논의하기도 했다.
금융당국 또한 스테이블코인을 포함한 가상자산 내 실물 연동형 자산군에 대한 제도 마련 필요성을 언급하며, 규율 체계 정비 가능성을 시사한 바 있다. 국회 디지털자산특위 내에서도 스테이블코인과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의 관계 설정, 감독 주체, 외환 규제 적용 범위 등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
김갑래 자본시장연구위원은 "미국은 디지털자산 시장의 성장을 정책적으로 지원하고 있고 다양한 관련 법안을 마련해 제도적 불확실성을 해소해가고 있다"며 "국내에서도 디지털자산 시장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서는 관련 제도를 조속히 정비하고 입법 작업에도 속도를 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다만 전문가들은 스테이블코인의 확산이 자금 이동의 효율성과 금융 접근성을 높이는 장점이 있는 한편 금융시장 안정성과 통화정책 운용에 새로운 리스크를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스테이블코인의 가장 큰 리스크는 준비금 투명성 부족과 환매 사태(런 사태) 가능성이다. 실제로 2022년 테라USD의 붕괴는 알고리즘 기반 스테이블코인의 구조적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며 외부 감시 강화, 회계 감리 체계의 도입 필요성을 환기시킨 사례로 꼽힌다.
황원정 국제금융센터 책임연구원은 "스테이블코인의 광범위한 활용 확대는 신용중개 기능 약화, 국채시장 교란, 통화정책 유효성 저하, '코인 런'(대규모 환매 사태) 등의 금융 불안 요인을 동반할 수 있다는 점도 유의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이어 "아무리 엄격한 준비금 요건을 갖춘다 해도 현금 교환 가능성에 대한 신뢰가 흔들릴 경우 자기실현적인 '스테이블코인 런'이 발생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국내 금융권도 이러한 변화에 발맞춰 블록체인 기술을 서비스 혁신의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는 동시에스테이블코인 확산에 따른 잠재 리스크에 대한 대응 체계도 선제적으로 갖춰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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