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들이 참전해 희생을 치른 전쟁은 아직도 완벽하게 종전되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여전히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이자 휴전 국가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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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발발과 국제사회의 개입━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38선을 경계로 남북이 미국과 소련의 영향권에 놓이게 됐다. 남과 북에는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적대적인 두 개의 분단 정권이 수립됐다. 북한 지도부는 1949년 3월 무렵부터 한반도에 대한 무력 통일을 구상했다. 김일성은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묵인하에 무력 통일을 감행했고, 이로써 한반도는 냉전의 최전선에서 무력 충돌을 맞게 됐다.북한 측이 수립한 남침계획의 기본전략은 1950년 6월 말에 전면 공격으로 신속히 서울을 점령하고 남한 내부에서 인민봉기를 유발해 한국 정부를 전복하는 것이었다. 이른 시일 내에 남해안까지 진출해 미국 증원군의 한반도 상륙을 막고 1개월 이내에 전쟁을 종결한다는 계획이었다. 당시 한국군은 비상경계령이 해제돼 병력의 3분의 1 이상이 외출한 상태였다. 병력·장비 모두에서 열세인 상황 속에 대응해야 했던 한국군은 패전을 거듭하며 후퇴했고 불과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됐다. 서울 방어선 유지를 위해 급히 내려진 '한강 인도교 폭파'는 많은 피난민과 국군의 퇴로를 막는 참극으로 기록됐다.
북한의 남침 소식을 들은 트루먼 당시 미국 대통령은 UN안전보장이사회의 긴급 소집을 요구했다. UN안보리는 유엔군 파병을 결정하고 16개국, 30만여명으로 구성된 유엔군을 한반도에 투입했다. 같은 해 9월15일 감행된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은 전세를 일거에 뒤집는 계기였다. 인천상륙작전을 통한 전세 역전으로 한국군과 유엔군이 사실상 전쟁 이전의 상태를 회복했고, 10월1일 한국군과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압록강 인근까지 진격하면서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10월 말, 중국이 '항미원조'를 내세우며 인민지원군을 대규모로 투입하면서 전황은 다시 급변했다. 중국군은 막대한 병력으로 유엔군을 밀어붙였고, 유엔군의 방어선이 급속히 붕괴하며 이른바 '12월 후퇴'가 이뤄졌다. 12월26일 중국군과 북한군은 38선을 넘어 남진을 시작했고 다음 해 1월4일에는 다시 수도 서울을 점령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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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전쟁의 기억━
38선 부근의 전선에서는 고지를 뺏고 빼앗기는 치열한 고지 전투가 계속돼 수많은 양측 군인들의 목숨을 잃었다. 그러던 1951년 7월10일 본격적인 휴전회담이 시작됐고 난항을 겪던 휴전회담은 미소의 지도부가 교체되며 돌파구를 찾았다. 6.25전쟁은 시작된 지 3년1개월2일 만인 1953년 7월27일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조인됨으로써 막을 내렸다.한국전쟁은 중단됐지만 평화협정은 체결되지 않아 현재까지 법적으로 전쟁 상태가 유지되고 있다. 6월25일은 단순한 역사적 날짜가 아닌 분단과 전쟁의 상흔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상기시키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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