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적 금융이 정부의 금융정책 핵심 아젠다로 떠올랐다. 가계와 부동산에 몰린 금융권의 자금을 기업과 모험자본으로 돌려야 한다는 취지다.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모험자본 투자는 상업은행(CB)이 아닌 투자은행(IB)이 맡는다.

상업은행은 예금과 대출 금리 차익으로 수익을 실현하지만 투자은행은 기업어음 발행과 같은 자금조달 방식을 통해 덩치를 키우고 혁신이 창출될 가능성이 높은 분야에 자금을 공급한다. 미국의 초대형 투자은행인 골드만삭스가 대표적이다.


금융당국은 생산적 금융의 모범 사례로 은행을 지목했다. 금융위원회는 이달 중 생산적 금융 테스크포스(TF)를 통해 생산적 금융을 위한 혁신 과제를 선정하고 은행이 생산적 투자에 적극 나설 수 있도록 법, 제도, 규제, 회계, 감독관행 등을 전면적으로 검토한다.

구체적으로 은행의 주택담보대출 위험가중자산(RWA) 하한을 현행 15%에서 25%까지 높이고 국가전략 기술, 첨단산업구축을 위한 인프라 투자 등의 RWA를 최대 400%에서 100%로 낮추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위험가중치는 금융사가 외부에 공급한 자금의 회수 가능성 등 투자위험을 반영한 지표다.

은행이 100억원 규모의 주담대 대출을 보유하고 있을 경우 현재(위험가중치 15%) 기준 위험자산은 15억원으로 최소 자기자본비율 기준(8%)을 감안하면 1억2000만원을 적립해야 한다. 가중치가 25%로 상향되면 위험자산은 25억원, 필요자본은 2억원으로 늘어난다.


반면 첨단산업 투자는 100억원을 공급할 때 기존(위험가중치 최대 400%)에는 32억원의 자기자본을 쌓아야 했지만 RWA를 100%로 낮추면 위험자산은 100억원, 쌓아야 할 자기자본은 8억원으로 줄어든다. 위험자산이 늘어도 쌓아야 하는 자기자본이 줄어들기 때문에 은행이 첨단산업 대출·투자 여력을 키울 수 있다.

은행권은 생산적 금융 확대를 위해 글로벌 투자은행 수준의 경쟁력 확보가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위험가중자산 등 건전성 규제 완화와 함께 신사업 진출을 위한 각종 규제를 풀어줘야 한다는 요구다.

국내 은행들의 상반기 실적을 살펴보면 증권·외환·파생 등 금리나 환율 같은 시장환경에 민감한 항목에서 비이자이익이 늘었다. 금융지주가 이자 이익 편중 개선, 신용평가 체계 고도화, 자회사 투자 역량 강화 등에 나서고 있지만 투자일임업 허용범위 확대, 스테이블코인 시장 진출 등 신사업을 확대할 수 있는 제도 개선이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실제 '글로벌 IB' 공룡으로 성장한 골드만삭스의 역사를 살펴보면 1993년 폐지된 '글래스-스티걸법'이 주효했다.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업무 영역을 허문 법안으로 정책당국의 규제 완화 기조에 시티, 체이스맨해튼 등 대형 은행이 증권·보험업에 진출해 종합금융사로 성장했고 '제2의 골드만삭스'를 꿈꾸는 은행들이 늘어났다.

일본의 대형은행(메가뱅크)도 1996년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가 금융시스템 개혁에 나서자 은행이 모험자본 공급을 시작했다. 1998년 미즈호은행의 투신상품 판매가 허용됐고 은행 창구에서 주식을 구입할 수 있도록 증권거래법이 개정됐다.

정부가 기업과 모험자본에 생산적 금융을 제공하는 '한국형 골드만삭스'의 탄생을 바란다면 은행의 숙원 과제인 투자일임업 허용 등을 검토해야 한다. 은행은 기업 여신 담당자의 전문성을 높이고 기업금융 성과에 인센티브를 줄 수 있도록 업무 환경도 조성해야 한다. 인사 평가의 핵심 기준인 핵심성과지표(KPI)에 기업 여신업무 성과를 적극적으로 반영할 필요도 있다. 생산적 금융의 정책 방향을 정했으면 이에 걸맞은 규제 완화가 필요하다.
이남의 경제금융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