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와 데이터센터, 반도체 클러스터로 인한 전기수요가 급격히 증가하고, 재생에너지는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문제는 전기가 생산되는 속도보다, 그 전기를 실어 나를 송·배전망을 깔고 보강하는 속도가 훨씬 느리다는 데 있다. 한전이 올해 5월 발표한 '제11차 장기 송변전설비계획'은 2038년까지 72조8000억원을 전력망 확충에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서해안 해저(HVDC) 송전망만 해도 약 11조원 규모다.

적자에 허덕이는 한전이 그만한 투자를 하는 것도 어렵겠지만 예산만 있다고 속도가 날까? 한국에서 전력망은 '돈·도면·삽'의 문제가 아니다. 주민 수용성과 인허가라는 현실의 벽 앞에서 공사는 늘어진다. 대표적으로 북당진–신탕정(345kV) 선로는 2003년 착수 후 21년 만인 2024년 11월에야 가동됐다. 동해안–동서울 HVDC도 변환소 인허가 지연으로 핵심 구간이 아직 묶여 있다. 이로 인해 동해안 18GW 발전설비 중 약 7GW는 송전이 불가능하다. 강릉삼척 일대 화력발전 이용률이 20~30%대로 떨어지는 이유다.


호남 역시 사정이 비슷하다. 재생에너지 출력 제한이 잦아지며 2024년 9월부터 2031년 말까지 신규 발전 인허가가 중단된 상태다. 결국 송전망이 없으면 재생에너지 확대는 구호에 그친다.

전력망은 평상시에도 고장(선로·변압기 1기 탈락)을 가정해 여유를 남겨두는 N-1 신뢰도 기준으로 설계·운영된다. 이 기준은 대정전을 막는 안전판이지만, 결과적으로 일부 설비를 상시로 비워두는 것처럼 보이는 특성이 있다. 우리나라는 13년전 2011년 9월15일에 발생한 '9·15 대규모 정전사태'(블랙아웃)이후 세계최고수준으로 관리되고 있다. 우리가 정전을 거의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오래된 아파트에 살면서 올해 여름 폭염 내내 거의 매일 저녁 정전을 겪었다. 변압기 용량이 수요 급증을 못 따라갔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정전이 불편하긴 해도 반복되니 충전등, 촛불 등을 준비하며 익숙해 졌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부하(負荷)를 100% 무정전으로 설계·운영하는 것이 비용 면에서 보면 비현실적이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시의 일반 전원 일부는, 고의가 아닌 관리된 단전(수요조정·순환정전)을 사회적으로 허용하는 편이 전체 시스템 안정성과 비용 측면에서 합리적일 수 있다.


지상 송전망은 수용성 한계에 부딪혔다. 그래서 서해안 해저 HVDC가 '에너지고속도로'란 이름으로 부상했다. 2030년 완공 목표, 총연장 620km, 사업비 약 11조 원(구간·사양 확정에 따라 변동) 같은 윤곽도 나왔다. 기술·비용 부담은 크지만, 육상 갈등 회피와 대용량 수송이라는 이점이 있다. 다만 해저라 해서 민원이 '0'인 것도 아니다. 육지에 올라오는 송전망,변전소가 또 다른 갈등의 불씨가 될 수 있다.
정부의 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은 전력 목표수요가 연 1.8% 증가해 2038년 129.3GW에 이를 것으로 본다. 무탄소 전원(원전+재생) 비중은 2030년 53%, 2038년 70.7%를 목표로 잡았다. 전력은 더 많이, 더 넓게, 더 불규칙하게 흐르게 된다. 망 투자를 늦추면, 출력제한·혼잡비용·정전 리스크가 요금으로 돌아온다.

그렇다면, 무엇을 바꿔야 하나?

첫째, 수용성을 '설계'에 넣자. 주민 참여·정보 공개·대안 비교(지상/지중/해저)의 절차를 제도화하고, 지역 편익(요금 할인·커뮤니티펀드 등)을 정식 장치로 넣어 갈등비용을 숨기지 말아야 한다. (영국은 이미 이런 방식으로 속도를 내고 있다)

둘째, 이미 깔린 망을 더 똑똑하게 쓰자. 신뢰도 등급(필수/중요/일반)별 공급과 선택형 신뢰도 요금제를 도입해, 필수부하는 최대 보호하고 일반부하는 피크 시 한시적 단전·부하 감축을 전제로 할인하는 구조로 바꾸자. 혼잡·제약비용을 줄이는 방향으로 계통 투자와 운영을 연동하고 수요반응(DR)·저장장치(ESS)와 계통 보강을 결합해 '송전선 1줄 더'의 대안을 수치로 비교하는 것도 필요하다.

셋째, 거버넌스를 바꿔보자. 국회는 올해 '국가 전력망 확충 특별법'을 통과시켜 인허가 특례·갈등관리·재원 조달의 틀을 마련했다. 이 틀을 실효적으로 구동하려면, 중앙–지자체–사업자가 단일 창구에서 일정과 보상을 명확히 해야 한다.

넷째, 요금 결정은 '정치'가 아니라 전력망 투자와 서비스 수준(신뢰도·품질), 혼잡·제약비용 절감 효과를 같은 표 안에 올려놓고 판단해야 한다. 그래야 '합리화=인상'이라는 단선적 등식을 깰 수 있다. 어떤 해에는 오를 수도, 다른 해에는 제약비용 절감분만큼 내릴 수도 있어야 한다.

수용성을 제도 안으로 끌어들여 공정하게 보상하고, 투자와 운영을 데이터로 연결해 제약비용을 줄이며, 요금은 서비스 수준과 성과가 드러나는 방식으로 독립적으로 결정하도록 해야한다.

그날, 내 아파트의 여름 저녁이 매번 암흑으로 꺼졌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모든 걸 무정전으로 만들겠다는 착각이었다. 이제는 현실을 받아들이자. 합리적으로, 투명하게, 공정하게.
조영준 대한상공회의소 지속가능경영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