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한미는 미국이 한국에 부과하기로 한 25% 상호관세를 15%로 낮추는 대신 한국이 총 3500억달러(약 486조원) 규모의 대미 투자를 진행하는 내용에 합의했다. 하지만 대미 투자액의 운용과 수익 배분을 두고 양국 간 입장차가 발생하면서 공식 문서화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미국은 직접 투자 비중 확대를 요구하고 있지만, 우리 정부는 직접 투자를 약 5%로 두고 나머지를 출자·대출·보증 등으로 채우겠다는 입장이다.
추가 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진 사이 현장에서는 여전히 높은 관세가 적용되고 있다. 일본은 트럼프 대통령이 미·일 무역 합의 이행을 위한 행정명령에 서명해 한국보다 먼저 관세 인하 효과를 누리게 됐다. 오는 16일부터 일본산 차량에는 15% 관세가 적용, 국내 완성차 업체들의 경쟁력 저하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현대차그룹은 미국에서 고율 관세와 전기차(EV) 세액공제 폐지라는 이중고에 직면했다. 최근 판매 호조를 보이는 하이브리드차(HEV)로 위기를 타개할 계획이지만, 이 역시 한계가 있다는 평가다. 현재 미국서 판매하는 HEV 물량 대부분이 국내에서 생산돼 미국으로 수출되고 있어서다. HEV 판매를 확대하려면 그만큼 높은 관세에 노출되는 물량을 늘려야 하는 상황이다.
지난 7월 미국 HEV 시장 점유율은 토요타(54.9%), 혼다(19.7%), 포드(10.8%), 현대차(7.3%), 기아(7.3%)로 집계됐다. 1위 토요타는 켄터키주 공장에서 인기 모델 캠리 하이브리드를 생산하고 있으며 혼다 역시 CR-V 하이브리드를 미국에서 만든다. 현지 생산 기반을 갖춘 일본 기업들이 관세 우위까지 얻으면서 현대차·기아의 현지 가격 경쟁력이 악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현지 생산을 위한 HEV 공급망 구축도 단기간 내 불가능할 전망이다. 향후 미국에서 출시될 신규 HEV 모델에는 현대차그룹의 차세대 시스템 'TEMD-2'가 적용될 예정인데, 이에 필요한 하위 부품사들의 현지 공장 신설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현대차그룹이 현지 부품 조달을 확대할 경우 국내 영세 업체들은 수익성 악화는 물론 생존 위기까지 내몰릴 수 있다는 관측이다.
실제 미 관세로 인한 국내 자동차 부품사들의 타격은 상당한 편이다. 지난 8월 자동차 부품 수출액은 16억7000만달러(약 2조3275억원)로 전년 대비 8.9% 감소했다. 한국자동차산업협동조합에 따르면 미국으로 자동차 부품을 수출하는 국내 기업의 66.3%가 대미 관세를 직접 부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완성차 업체와의 관계상 협력사가 관세를 이유로 납품 단가 인상을 요구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지적이다.
최근 멕시코 정부가 한국을 포함한 자유무역협정(FTA) 미체결국을 대상으로 최대 50% 관세 부과를 추진하는 것도 부품 업계엔 부담이다. 자동차 부품은 대(對)멕시코 수출 1위 품목으로 지난해 수출액만 21억5000만달러(약 2조9865억원)에 달했다. 연간 40만대를 생산할 수 있는 기아 멕시코 공장 역시 부품 상당수를 한국에서 조달하는 경우가 많아 향후 생산 원가가 상승할 가능성이 크다.
이호근 대덕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현대차그룹과 달리 영업이익률이 3%에도 못 미치는 영세 부품업체는 고율 관세에 따른 가격 인상분을 자체적으로 흡수하기 어렵다"며 "관세가 장기화할 경우 영업이익률이 1% 미만으로 떨어져 경영 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미국 판매 비중이 높은 대형차에 납품하는 부품사일수록 부담이 더 클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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