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징벌적 상속세가 기업승계의 걸림돌로 지적되는 가운데 기업의 연속성을 보장하는 아일랜드식 세제 모델이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사진=구글 생성형 AI Gemini
# 20년간 땀과 열정으로 아일랜드에서 태양광 기업을 키워낸 패트릭씨(68세). 회사를 사랑하는 딸 시네이드(39세)에게 물려주고 은퇴한다는 계획이다. 다른 나라라면 으례 상속세 고민에 뜬눈으로 밤을 보내야하겠지만, 패트릭씨는 걱정이 없다. 아일랜드에는 '사업 자산 세금 감면'(Business Property Relief, BPR) 제도가 있기 때문.

BPR 제도가 도입되기 이전 아일랜드에서도 기업가치 200만 유로(약 33억원)의 회사를 증여할 경우 세금으로만 55만 유로(약 9억원)를 내야했다. 하지만 BPR는 이 가운데 90%인 180만 유로를 과세 대상에서 빼준다. 결과적으로 과세 기준 금액은 20만 유로에 불과해 자녀 증여 비과세 한도(40만 유로)를 넘지 않는다. 결국 부녀는 단 한 푼의 세금도 내지 않고 회사를 승계할 수 있다. 기업경영의 안정성과 영속성을 위해 이처럼 파격적인 상속세 제도를 도입한 아일랜드에 한국을 비롯해 여러나라가 주목하는 배경이다.
사업 자산 세금 감면(BPR) 안정적인 가업 승계 지원
1994년 제정된 BPR 제도는 가업을 승계할 때 상속·증여받는 사업 자산 가치의 90%를 과세표준에서 공제해준다. 덕분에 상속·증여세를 내기 위해 기업의 핵심 자산을 매각하거나, 경영권 방어가 어려울 정도로 지분을 처분할 필요가 없다. 이는 기업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국가 경제의 최우선 과제로 삼는 아일랜드 정부의 정책적 의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파격적인 혜택이 상속 직전의 '세테크' 수단으로 악용되는 것을 막기 위한 안전장치도 마련돼 있다. 바로 '최소 보유 기간'이다. 상속의 경우 피상속인이 사망 전 최소 2년 이상 해당 사업 자산을 보유하고 있었어야 한다. 증여는 증여자가 증여하기 전 최소 5년 이상 해당 자산을 보유해야 한다. 이는 기업들로 하여금 최소 2년에서 5년 이상의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다음 세대를 준비하도록 유도하는 효과가 있다.

BPR 제도는 세금 감면을 받은 후에도 수혜자(자산을 물려받은 사람)에게 일정 기간 사업을 유지할 책임을 부과한다. 만약 상속·증여일로부터 6년 이내에 정당한 사유 없이 해당 사업 자산을 매각하고 대체 사업 자산을 취득하지 않으면 감면받았던 세금을 다시 납부해야 하는 '클로백'(Clawback) 조항이 적용된다.

BPR 제도는 상속·증여세를 '징벌적 과세'의 관점이 아닌 '국가 경제의 연속성'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가업의 안정적인 승계로 국가 경제의 기반을 튼튼히 하고 고용을 안정시키며 장기적인 성장 동력을 확보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든 것이다.


한국 기업들은 '가업상속공제' 제도가 있지만 여전히 어려움을 호소한다. 업종 변경 금지, 고용 유지, 지분 매각 제한 등 비현실적이고 까다로운 사후관리 요건이 기업의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홍기용 인천대 경영학부 교수(전 한국세무학회장)는 "상속세가 높으면 부자들이 한국에 머물 이유가 없다"며 "글로벌 개방경제 체제에서 제도와 조세가 국제 기준을 벗어나면 외국인 자본은 들어오지 않고 한국인 부자는 해외로 빠져나가게 된다"고 밝혔다. 이어 "현실적으로 한 번에 OECD 평균 수준으로 낮추긴 어렵더라도 장기적으로는 25%까지 단계적으로 인하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더블린 시내 아일랜드 국기가 걸린 펍 앞으로 초록색 이층버스가 지나가고 있다. /사진=최유빈 기자
韓 상속·증여 세율 합리화 필요성↑
한국과 아일랜드의 법인세는 세율, 과세 방법이 모두 다르다. 한국의 상속세 최고세율은 50%다. 매출 5000억원이 넘는 기업의 최대주주가 상속받으면 최고세율이 60%까지 올라간다.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중 상속세가 없는 11개국을 포함한 전체 평균 세율(15%)의 4배에 달하는 수치다. 과세하는 국가들만의 평균(25%)과 비교해도 압도적으로 높다. "두번 상속하면 회사가 사라진다"는 탄식이 쏟아지는 이유다.

아일랜드의 상속세율은 33%로 한국의 절반 수준이다. 주요국 평균보다 높은 편이지만 실제 부담은 더 작은 것으로 평가된다. 고인이 남긴 재산 총액에 세금을 매기는 한국의 '유산세'와 달리 아일랜드는 상속인 각자가 실제로 물려받은 재산을 기준으로 과세하는 '유산취득세' 방식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물가 상승을 반영한 세제 개편 여부도 다르다. 한국은 상속세 과세표준(과표) 구간이 1999년 이후 25년간 단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아일랜드는 올해부터 상속세 기준 면제 한도를 상향 조정했다. 부모로부터 재산을 받는 자녀(친자·양자 포함)의 비과세 한도는 33만5000유로에서 40만 유로로 올라갔다.

박선민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런던무역관 연구원은 "아일랜드 상속세 제도는 기업 승계나 자산 이전 측면에서 우호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며 "비교적 낮은 법인세와 함께 상속, 증여세 부과 체계도 기업과 자산 이전에 부담을 줄이는 방향으로 설계돼 있다는 점에서 한국과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