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는 낮은 세율 정책을 기반으로 정보기술(IT), 생명과학, 제약 등 첨단 산업의 다국적 기업을 끌어들여 세입 기반을 강화하는 동시에 고부가가치 일자리를 창출하며 경제 체질을 바꿨다. 사진은 지난 9월 찾은 아일랜드 더블린 중심가에 위치한 아일랜드 투자개발청(IDA)의 전경. IDA는 이곳에서 외국인 직접투자 유치 전략을 총괄하며 아일랜드의 경제 성장을 설계한다. /사진=김성아 기자

전 세계 인구 82억명 가운데 '레드 헤어'(붉은 머리카락)를 가진 사람의 비중은 고작 1%에 불과하다. 그러나 아일랜드에서는 열명 중 한명이 레드 헤어다. 아일랜드가 일명 '레드 헤어의 나라'로 불리는 이유다. 더 흥미로운 점은 머리카락 색이 실제로 붉게 드러나지 않더라도 이를 만들어내는 MC1R 유전자 변이를 지닌 아일랜드인은 전체 인구의 절반 가까이에 달한다는 사실이다.

"레드 헤어는 고집이 세다"는 아이리시 조크(Irish Joke)가 있다. 얼핏 가벼운 농담처럼 들리지만 아일랜드의 근현대 경제사를 들여다보면 단순한 우스갯소리만은 아니다. 두차례 국가부도 위기에서 다시 일어나 유럽의 투자 허브로 도약한 배경에는 아일랜드 특유의 '고집'이 자리 잡고 있어서다.


외국인 직접투자(FDI)를 전담하는 아일랜드 투자개발청(IDA)은 아일랜드의 FDI 유치 전략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한 기관이다. 그래픽은 IDA의 성과와 FDI 기반이 아일랜드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나타낸 그래프. /그래픽=강지호 기자

그 고집은 정권이 바뀌어도, 위기가 찾아와도 외국인 직접투자(FDI)를 흔들림 없이 밀어붙인 데서 잘 드러난다. 아일랜드는 수십년 동안 낮은 세율을 고수하는 등 기업 친화적 환경을 유지해 정보기술(IT)·생명과학·제약 등 첨단 산업의 다국적 기업 1800개 이상을 끌어들였다. 이를 통해 세입 기반을 강화하는 동시에 고부가가치 일자리를 창출해 경제 체질을 차근차근 바꿔왔다.

FDI를 전담하는 아일랜드 투자개발청(IDA)은 이처럼 고집스러운 투자 유치 전략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온 기관이다. IDA는 1949년 정부 산하 전문기구로 출범한 이후 75년 동안 글로벌 기업의 아일랜드 진출을 이끌며 국가 성장 전략의 핵심 축으로 자리 잡았다. 세계 각국의 정부 인사와 미디어 취재진이 아일랜드를 방문하면 IDA부터 찾는 이유다.
마이클 로한 IDA CEO는 2003년 IDA에 합류해 생명과학 분야 글로벌 총괄을 비롯해 인재·혁신·변화 전략을 주도하다 2023년 최고경영자 자리에 올랐다. 사진은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지난 9월 마이클 로한 IDA CEO와 인터뷰를 가진 모습. 그는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아이리시였다. /사진=김성아 기자
지난 9월, 아일랜드 더블린 한복판에 자리한 IDA 본사에서 만난 마이클 로한(Michael Lohan) 최고경영자(CEO). 그 역시 '자랑스런'(?) 레드 헤어를 지닌 전형적인 '아이리시'였다. 바쁜 일정을 쪼개 배정된 인터뷰 시간은 딱 45분. 로한 CEO는 미리 준비한 여러장의 A4 용지에 빼곡히 적은 내용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IDA의 성과와 향후 전략을 꼼꼼하게 설명했다. IDA CEO가 국내 언론과 인터뷰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첫인상은 그야말로 '글로벌 비즈니스맨' 그 자체였다. 멋들어진 맞춤 정장에 반짝이는 까만 구두, 세련된 제스처까지. 그런데 정작 그는 자신을 '촌놈 출신'이라 소개했다. 아일랜드 서북부 리트림의 시골 농가에서 세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자란 그는 지금도 80대 아버지가 지내는 고향을 떠나지 않고 살고 있다. 무학의 아버지가 넉넉지 않은 살림 속에서도 꺾지 않은 교육열 덕에 집안 최초로 대학 문턱을 밟았고 졸업 이후 2003년 IDA에 합류했다. 20년이 흐른 2023년, 글로벌 기업을 상대하는 협상 테이블의 수장 자리에 오른 그는 자신의 여정을 두고 "아직도 신기하다"며 웃음 지어 보였다.
'원스톱 숍': 글로벌 기업 매료시킨 '맞춤형 지원'의 힘
로한 CEO는 "외국인 투자 유치는 곧 아일랜드를 살리는 일"이라며 입을 뗐다. 외국 기업을 유치하면 그 기업이 아일랜드에 좋은 일자리를 창출하고, 좋은 일자리가 많아지면 아일랜드 경제가 살아난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아일랜드는 IDA의 주도 아래 다국적 기업을 대거 유치하며 세계가 깜짝 놀랄만한 경제적 성과를 일궈냈다.


로한 CEO는 "지난해 기준 다국적 기업들이 납부한 법인세는 전체의 88%에 달했고 이들을 통해 역사상 최대 규모인 19억유로의 연구개발(R&D) 투자를 끌어냈다"며 "또 30만명이 넘는 고부가가치 일자리를 창출했는데 이는 단순한 투자 유치 성과를 넘어, 아일랜드의 산업 생태계를 고도화하고 국가 경쟁력을 끌어올린 동력이 됐다"고 설명했다.

다국적 기업의 유입은 지역 균형 발전을 끌어내는 힘이기도 하다. 인구 감소와 지방 소멸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한국 정부가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다. 로한 CEO는 "제가 태어나고 자란 리트림은 한때 척박한 농촌이었지만 외국 기업들이 하나둘 들어서면서 공장이 들어서고 일자리가 늘어나자 침묵 같던 시골은 점차 활기를 되찾았다"고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았다. 그는 "길(기회)은 전국에 깔려 있어야 한다"며 "작은 도시라 해도 대학, 스타트업 생태계, 글로벌 기업이 서로 연결되면 세계적 클러스터로 성장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IDA는 수도 더블린에 집중된 투자를 지방으로 분산시키기 위해 토지를 직접 매입하거나, 지역 부동산 개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산업별 특화 클러스터를 조성하는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 현재 약 60%의 투자가 더블린 권역 밖에서 이뤄지고 있다. 그 결과 남서부 도시 코크(Cork)는 글로벌 바이오·제약 산업의 핵심 거점으로, 서부 도시 골웨이(Galway)는 세계적 수준의 의료기술(MedTech) 허브로 부상했다.
외국인 투자자들을 아일랜드로 끌어들이는 IDA의 매력은 맞춤형 지원과 원스톱 숍(One-Stop Shop) 서비스다. 사진은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지난 9월 마이클 로한 IDA CEO와 인터뷰를 가진 모습. /사진=김성아 기자
그렇다면 세계 각국이 외국인 투자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는 상황에서 아일랜드를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외국인 투자유치국으로 만들어낸 IDA의 매력은 무엇일까. 핵심은 맞춤형 지원과 '원스톱 숍'(One-Stop Shop) 서비스다. 로한 CEO는 "IDA는 기업이 공장, 사무실, 데이터 센터 등을 세울 최적의 입지를 찾을 수 있도록 광범위한 부동산 정보와 계약 지원을 제공한다"며 "초기 투자 단계에서는 자본 보조금, 직원 훈련 보조금, R&D 세금 공제 등 다양한 인센티브 패키지를 기업 상황에 맞춰 맞춤형으로 제시한다"고 말했다.

복잡한 행정 절차의 해결사 역시 IDA다. 인허가와 환경 평가, 규제 준수 같은 까다로운 과정을 대신 안내·지원해 기업이 빠르고 안정적으로 사업을 시작하고 확장할 수 있도록 돕는다. IDA가 정부 산하 기관이지만 수장을 'CEO'라 부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관료 조직이 아니라 기업 친화적인 파트너임을 강조해 "아일랜드라면 실패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서다.

IDA의 적극적인 지원은 아일랜드에 진출한 외국 기업들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 2017년 아일랜드에 발을 디딘 국내 의약품 원료(API) 생산 기업 SK바이오텍도 IDA의 도움을 받았다. 조너선 호칸 SK바이오텍 아일랜드 최고재무책임자(CFO)는 "브리스톨마이어스스큅(BMS)의 아일랜드 공장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직원들의 원활한 전환을 위해 IDA로부터 체계적인 교육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며 "이 밖에도 각종 인허가 업무 지원, 공장 운영과 사업 추진에 필요한 전문 인력 추천까지 도와줬다"고 말했다.

이점에도 아일랜드에 진출한 한국 기업은 손에 꼽는다. SK바이오텍과 두산 정도다. 그러나 한국 기업들이 집중하고 있는 신사업 포트폴리오를 고려하면 지구 반대편에 있는 이 작은 나라는 분명히 눈여겨볼 만한 투자처다.

로한 CEO는 "현재의 경영 환경은 지정학적 불확실성과 보호무역주의가 겹친 시기"라고 진단하며 "이를 돌파하기 위해 IDA는 미래 성장 축으로 ▲디지털화와 인공지능(AI) ▲반도체 ▲지속가능성과 그린 경제 ▲헬스케어를 주목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반도체와 생명과학 등은 한국 기업들이 이미 강점을 지닌 분야"라며 "아일랜드와의 접점이 많아 협력 여지가 크다"고 기대감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