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0년 가까이 영국의 식민지로 '유럽의 변방'에 머물던 아일랜드는 이제 영국보다 잘 산다. 그래픽은 아일랜드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추이. /그래픽=강지호 기자(머니S)
800년 넘게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일랜드는 이제 영국을 넘어서는 '작지만 강한, 초록 섬'이 됐다. 지난해 아일랜드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10만달러를 훌쩍 넘어 세계 2위에 올랐다. 그 사이 영국은 2000년대 초반부터 5만달러 수준에 머물러 있다.

유럽에서 '가장 가깝고도 먼' 두 나라. 이들의 수도 풍경에는 두 나라의 뒤바뀐 명운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한 때 유럽 금융의 심장으로 불리며 세계 자본을 빨아들이던 런던은 서서히 그 위용을 잃어 갈수록 색이 바래는 모습이다. 반면 바다 건너 더블린은 거의 매일 글로벌 경영인들이 찾아오는 유럽의 핵심 성장점으로 자리매김했다.


수수께끼 같은 이 변화의 핵심은 개방성. 아일랜드는 새로운 환경과 기회가 필요한 세계 자본을 향해 과감한 투자 유치 전략과 기업 친화적 정책을 펼쳤다. 한국이 불과 반세기 만에 산업화와 세계화를 동시에 이뤄낸 궤적과도 겹쳐 보이는 대목이다.

이 작은 섬의 여정을 통해, 한국 경제가 직면한 위기를 돌파하고 재도약할 수 있는 해법을 모색해 본다.
정적 감도는 런던의 '빌딩숲'… 오피스 공실률 5년 만에 2배
카나리 워프는 수백개 사무실이 들어선 오피스 빌딩들이 자리잡고 있어 유동 인구가 적잖은 곳이지만 목 좋은 1층 외부 상가에도 빈 점포가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사진은 지난 9월 영국 런던 카나리 워프(Canary Wharf)역 내부와 그 일대의 모습. 유럽 금융의 심장으로 불리던 이곳 출근길은 예전과 달리 인파가 뜸해져 한산한 분위기를 드러냈다. /사진=최유빈, 김성아 기자

머니S 취재진이 런던의 카나리 워프(Canary Wharf)를 찾은 것은 지난 9월 2일(현지시간). 화요일 평일이었다. 유리와 철골이 얽힌 수려한 아치 천장의 카나리워프 지하철 역사는 인상적이었다. 한때 글로벌 금융의 심장부였고, 숱한 인파와 바쁜 발걸음으로 정신이 없었을 이곳은 하지만 줄곳 나른했다. 카나리 워프는 수백개 사무실이 들어선 오피스 빌딩들이 자리잡고 있어 유동 인구가 적잖은 곳이지만 목 좋은 1층 외부 상가에도 빈 점포가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점심 시간이 다가올 무렵 찾은 인근 퀘이 스퀘어(Quay Square) 거리의 스테이크 레스토랑 '굿맨 카나리 워프'도 굳게 문을 닫고 있었다. 15년 동안 영업을 이어오던 이곳은 지난달 "팬데믹 이후 이어진 여러 도전 과제로 더 이상 운영을 지속하기 어렵다"며 결국 폐점을 알렸다.


카나리 워프가 속한 런던 도클랜즈 코어(Docklands Core) 지역의 오피스 공실률은 2025년 1분기 18.6%로 집계됐다. 코로나19 팬데믹 직전인 2020년 3월 9.8%에서 불과 5년 만에 두 배 가까이 치솟았다.

시장에서는 카나리 워프의 공실 확대의 중심에는 영국 금융 서비스 산업의 위상 약화가 자리 잡고 있다고 평가한다. 사진은 지난 9월 찾은 영국 런던 카나리 워프의 원 캐나다 스퀘어(One Canada Square) 외경. 한때 금융 인파로 붐비던 이곳은 이제 출근길에도 한산한 모습이다. /사진=최유빈, 김성아 기자
시장에서는 카나리 워프의 공실 확대를 단순히 코로나19로 인한 재택근무 확산의 여파로만 보지 않는다. 경기 위축으로 금융시장의 역동성이 약화되고 브렉시트 이후 금융사들이 규제 리스크를 피하기 위해 유럽 대륙으로 조직을 이전한 것이 공실률 상승의 근본적 배경이라는 설명이다.

특히 브렉시트가 이러한 흐름을 가속화했다.

보리스 존슨 전 영국 총리는 2019년 총선에서 "브렉시트를 완수해 이민을 통제하고 자유무역을 추진하겠다"고 경제 부흥을 약속하며 당선됐다. 하지만 브렉시트 이후 존슨 전 총리가 약속했던 부흥의 기운은 오히려 사그러들었다. 제조업에서는 규제 장벽과 인허가 부담이 늘어나면서 경쟁력이 약화됐고 금융사들은 더 이상 런던을 거점으로 삼을 수 없다며 유럽 각지로 본사와 조직을 분산 이전하기 시작했다.

영국이 브렉시트로 세계와의 거리를 두는 동안, 오래전부터 개방의 길을 걸어왔던 아일랜드는 알토란같은 반사이익을 누렸다. 아일랜드는 글로벌 기업들의 '탈런던' 행렬을 고스란히 새 성장 동력으로 끌어안았다. 한국의 한 대형 금융사 역시 런던 지사를 축소하고 아일랜드로 분산 이전했다.
'작지만 강한, 초록 섬', 아일랜드… 글로벌 기업의 새 거점이 된 더블린

더블린은 리피강을 경계로 강북과 강남으로 나뉘는데 이곳 남쪽 부두 일대는 구글, 메타, 아마존, 링크드인 등 세계적인 정보통신기술(ICT) 기업들의 유럽 본사가 모여드는 혁신 거점으로 변모했다. 사진은 지난 9월 방문한 아일랜드 더블린 실리콘독스의 전경(위)과 더블린 리피강 위에 놓인 사무엘 베케트 브리지 앞. 아침 출근길 인파가 다리를 건너며 분주히 오가는 모습에서 '유럽의 실리콘밸리'로 떠오른 더블린의 활력을 엿볼 수 있다. /사진=최유빈, 김성아 기자

아일랜드 더블린의 풍경은 런던과는 사뭇 다른 활기로 채워졌다.

런던에서 비행기로 한 시간 남짓 이동하면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에 닿는다. 백야가 드리운 더블린은 해가 질 줄 모르는 탓에, 저녁 시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중심가인 오코넬 거리를 줄곧 걸을 수 있었다. 이곳에선 고층빌딩이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빅토리아 시대에 지어진 붉은 벽돌 건물들이 낮게 이어졌고 그 지붕선 위로는 첨탑 만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산업화가 늦어 고층 건물을 세울 여력이 없었던 탓이다.

리피강 남쪽 강변에 둥지를 튼 '실리콘독스'(Silicon Docks)는 분위기가 또 다르다.

더블린은 리피강을 경계로 강북과 강남으로 나뉘는데 이곳 남쪽 부두 일대는 낡은 창고와 부두를 개조해 만든 저층 오피스들이 빼곡하다. 지금은 구글, 메타, 아마존 등 세계적인 정보통신기술(ICT) 기업부터 핀테크, 글로벌 금융사도 둥지를 튼 다국적 기업의 유럽 본사가 모여드는 혁신 거점으로 변모했다.

실리콘독스 일대에선 글로벌 기업과 젊은 인재들이 뒤섞여 빚어내는 에너지가 쉽게 체감된다. 리피강변 산책로에는 변덕스러운 아일랜드의 날씨에도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즐기는 젊은 직장인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 생동감은 아담한 더블린을 한층 풍성하게 만들었다.

'작지만 강한, 초록섬'

이곳에서 만난 더블린 토박이 시에나 오코너씨는 아일랜드를 이렇게 표현했다. 그는 "아일랜드는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문을 닫기보다 더 크게 열어 온 나라"라며 "그게 우리가 버텨온 힘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어릴 적 부모님이 일자리를 찾아 영국으로 떠났던 기억이 있는데 이제는 외국 기업들이 아일랜드로 들어와 우리 세대가 일할 기회를 얻고 있다"고 말했다.
아일랜드의 저력은 위기 때마다 선택해온 개방성에서 비롯됐다. 사진은 지난 9월 찾은 더블린 실리콘독스의 아마존 유럽본사를 비롯 다국적 기업이 모여있는 빌딩과 구글 사옥의 전경. /사진=최유빈, 김성아 기자

지난 세기 내내 위기가 끊기지 않던 아일랜드의 회생 저력은 개방성.

가난했던 시절에도, 금융위기 속에서도 아일랜드는 세계와의 문을 닫기보다 더 크게 열며 돌파구를 찾았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유럽 최빈국이던 아일랜드는 강력한 개방 정책과 긴축 재정으로 돌파구를 열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국가 재정이 무너졌을 때도 아일랜드는 적극적인 외자 유치 전략을 다시 추진했고 그 결과 불과 3년 만인 2013년 구제금융에서 졸업했다.

브렉시트는 아일랜드에게 커다란 기회였다.

유럽연합(EU) 내 유일한 영어권 국가라는 지위와 함께 EU 시장 접근성을 동시에 갖춘 몇 안 되는 도시라는 점이 글로벌 기업의 선택을 이끌었다. 아일랜드 정부의 전략적 투자 유치도 이 흐름을 가속했다. 아일랜드 투자진흥청(IDA Ireland)은 법인세 인하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보고 연구개발(R&D)·인력 교육 프로그램에 대한 보조금과 기업 맞춤형 인센티브를 촘촘히 설계해 제공했다.

미쉘 윈트럽 주한아일랜드 대사는 "아일랜드는 매우 일관된 국가"라며 "기업들에게 동일한 지원과 혜택을 지속적으로 제공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인재 육성, 재정적 지원, 연구개발(R&D) 인센티브 등 다양한 정책 수단을 통해 기업들이 안심하고 투자할 수 있는 환경을 꾸준히 마련하고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