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의약분업 이후 약사업계가 최대 변곡점을 맞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동안 약국은 마스크 대란과 자가진단키트 품귀를 겪으면서도 국민건강을 지키는 최전선이었다. 팬데믹 이후 건강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늘면서 약국의 위상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대표적 변화는 건강기능식품 시장의 급성장이다. 관련 국내 시장 규모는 지난해 6조원, 2020년 이후 연평균 5% 이상 성장했다. 이 흐름에 제약·바이오 기업뿐 아니라 식품·유통업체까지 뛰어들었다. 올해 초 균일가 생활용품점 다이소가 대웅제약, 일양약품 제품을 3000~5000원대 초저가로 판매하며 화제를 모았다. CU·GS25 등 편의점도 전국 수천 개 점포에서 건강기능식품을 취급했고 초기 매출이 급증했다. 약국의 전유물이던 건강기능식품이 생활용품점과 편의점으로 확산하는 현실은 약사업계의 위기감을 키운다.


더 큰 파장은 '창고형 약국'이다. 지난 6월 경기 성남에 처음 개점한 이후 전국에서 유사 모델이 속출하고 있다. 일부 품목은 온라인보다 저렴하다는 점을 내세우지만 대량 구매에 따른 약물 오남용 우려가 크다. 무엇보다 의원급 의료기관을 결합하면 전문의약품까지 취급할 수 있어 동네 약국을 고사시킬 잠재력이 있다. 이는 2000년 의약분업으로 구축된 유통 생태계를 근본부터 흔드는 변화다.

현장의 목소리는 절박하다. 서울 종로5가의 '도매형 약국'에는 평일에도 긴 줄이 늘어서고 약사 수십 명이 포스기 앞에서 손님을 맞는다. "가격 경쟁만으로는 답이 없다. 상담과 신뢰가 약국의 마지막 보루"라는 약사들의 말은 현실을 압축한다. 도매형 약국은 저렴한 가격과 다양한 품목으로 전국에서 손님이 몰리지만 온라인 최저가와 비교하면 일부 품목은 오히려 비싸다. 결국 약국의 경쟁력은 단순 판매가 아니라 복약지도와 맞춤형 상담에 있다.

통상 약국에서 판매하는 약(제품)은 처방 유무 및 용도에 따라 전문의약품, 일반의약품, 의약외품, 건강기능식품 등으로 분류한다. 전문의약품은 의사의 진단과 처방이 있어야 구매가 가능한 반면 일반의약품은 의사 처방 없이 구입할 수 있다. 의약외품은 질병의 치료, 경감, 예방을 목적으로 사용하는 제품이며 건강기능식품은 인체에 유용한 기능성을 가진 원료나 성분을 사용해 만든 식품이다. 전문의약품과 일반의약품은 약국에서만 구매할 수 있고 의약외품과 건강기능식품은 일반 소매점이나 온라인 구매가 가능하다.


이 와중에 약사업계는 또 다른 이슈에 휘말려 있다. 최근 국회가 성분명 처방 의무화를 추진하자 의사협회는 "의약분업 파기"라며 거리로 나왔고 약사회는 "품절약 시대의 공공적 대안"이라며 맞서고 있다. 직역 갈등이 커질수록 국민 신뢰는 흔들린다. 정책의 본질은 환자 안전과 접근성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약사회는 그동안 의사협회에 치여왔지만 이번 이슈는 약사의 전문성을 부각할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약사업계는 지금 절체절명의 기로에 서 있다. 건강기능식품은 온라인과 다이소·편의점에, 일반의약품은 창고형 약국에 각각 밀리는 형국이다. 변화의 파도를 이끌지 못하면 97년의 업력은 과거의 영광으로만 남을 것이다. 약국이 단순 판매처가 아닌 '건강 플랫폼'으로 진화할 때 이 위기는 기회로 바뀔 수 있다. 약사의 전문성과 상담 기능을 강화하고 디지털 헬스케어와 연계한 서비스 혁신이 절실하다. 이끌 것인가, 따를 것인가, 비킬 것인가. 선택의 시간은 길지 않다.
박정웅 산업2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