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팡은 혁신의 아이콘이었다. 로켓배송으로 유통업의 판을 바꾸고 로켓프레시로 식품 물류의 새로운 기준을 세웠다. 수많은 노동자의 땀과 기술 투자가 만들어낸 성과였다. 이번 사태는 그 모든 성취를 한순간에 흔들고 있다. 고객 신뢰는 기업의 가장 큰 자산이다. 그 자산이 무너질 때 기술과 물류 혁신은 의미가 없다.
쿠팡은 한국에서 돈을 버는 기업이다. 지난해 쿠팡의 전체 매출은 약 41조원. 그중 88% 이상이 한국에서 발생했다. 글로벌 사업 비중은 12%에 불과하다. 한국 소비자가 쿠팡을 키웠고 한국 시장이 쿠팡의 성장 기반이다. 이번 유출 피해는 국민 4명 중 3명에 해당하는 3370만명에 달한다.
2014년 경주 리조트 참사 당시 코오롱그룹 이웅렬 회장은 사고 발생 9시간 만에 진흙탕에 엎드려 석고대죄했다. '사죄'였다. 최고 책임자가 어떤 자세를 보여야 하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기업은 위기 앞에서 어떤 대응을 해야 하는지 교훈을 남겼다. 최소한 최고경영자가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다는 메시지였다.
쿠팡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김범석 쿠팡Inc 이사회 의장은 이번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물류센터 화재, 노동자 사망 사고 때도 그랬다. 국회 국정감사 출석 요청에도 외국인 신분을 이유로 불참했다. 유통공룡으로 성장한 쿠팡에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나 책임은 지지 않는다. 이번 사태에서도 마찬가지다. 최고 의사결정권자의 침묵은 개인 선택이 아니다. 기업 문화와 리스크 관리의 방향을 결정짓는 행위다.
2일 국회 현안 질의에서 박대준 쿠팡 대표는 이번 사태에 대해 "김범석 의장에게 보고했다"면서도 "전적으로 제 책임"이라고 말을 돌렸다. 이어 "김범석 의장은 글로벌 비즈니스를 담당하고 있으며 거취는 모른다"고 답했다. '꼬리 자르기' 식 대응 아니냐는 질타가 쏟아졌다. 최고 의사결정권자가 실질적으로 한국 사업을 지배하고 있음에도 국내 대표가 모든 책임을 떠안는 구조가 적절한가 하는 의문이다. 국민 앞에서 김범석 의장이 직접 입장을 밝히지 않는 이상 '책임 회피'라는 비판은 피하기 어렵다.
업계는 그동안 김 의장이 시장을 어떤 철학을 갖고 바라보는지 지켜봤다. 그중 하나가 성장과 규모 일변도의 경영 철학에서 비롯한 배타적 기업 문화다. 공격적 확장과 효율 중심의 전략은 내부 소통을 약화시켰고 외부 비판에 방어적으로 대응하는 문화를 고착화했다는 지적이다. 이런 배타적 문화가 기업 내부뿐 아니라 산업 생태계까지 훼손했다고 입을 모은다.
김 의장의 책임 회피는 한국에서만 문제가 아니다. 쿠팡은 미국 뉴욕증권거래소(NYSE)에 상장된 기업이다. 이번 사태 이후 투자자 신뢰가 흔들리며 주가가 약세를 보이고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도 '책임 있는 대응'이 없으면 장기적 신뢰 회복은 어렵다. 미국 규정상 보안 리스크는 중대한 공시사항이다. 쿠팡이 한국 국민과 투자자 앞에서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 이유다.
쿠팡은 지금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기술과 물류 혁신을 넘어 책임 경영이라는 기본을 회복해야 한다. 김범석 의장의 공개 사과는 그 출발점이다. 지금이라도 '진흙탕'에 엎드려야 한다. 그것이 한국 국민과 투자자에게 보내는 최소한의 신뢰 회복 신호다. 사과는 시작일 뿐이다. 보안 강화 계획, 피해 보상, 재발 방지 대책이 뒤따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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