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 연출 허유리 PD "본인들 이야기 직접 쓴 할머니들… 감동"

전라북도 순창에 사는 할머니 4명이 랩을 하기 위해 모였다. 사진 왼쪽부터 백성자(75), 오순례(69), 김영자(75), 강성균(28), 박향자(62)씨. /사진=KBS 전주방송총국
1남 1녀 전남 곡성군 옥과면 옥과리
순창군에 시집 셋방살이 3000원짜리부터 시작한 내 자린
남편과 헌 옷 팔이
힘들어도 버텨
자식들 보는 행복감에
눈물 닦고 정신 차리자 내 새끼 밥 거를까
- 김영자 할머니 자작 랩
전라북도 순창에 사는 할머니 4명이 랩을 하기 위해 국악원에 모였다. 팀 이름은 할미넴. 외국의 유명 래퍼 이름 에미넴과 할머니를 합쳐 만들었다. 

작품 속 할머니들의 랩 선생님은 서울에서 랩을 하다 잠시 고향에 내려온 강성균씨(28)다. 강씨는 국악원에서 어르신들을 위한 랩 교실을 연다는 소식을 듣고 계약직 강사에 지원했다. 

강씨는 동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랩 교실에 들어올 할머니들을 모집했다. 강씨가 직접 만든 힙합 음악을 들려주자 할머니들은 낯설어하면서도 곧잘 따라 부르며 깔깔댔다.

그 결과 '얌전공주' 백성자(75), '꽃샘' 김영자(75), '부자입술' 오순례(69), '빅맘' 박향자(62) 할머니가 수업 당일 국악원에 걸음했다.

KBS 전주방송총국이 제작해 지난 1월 전국 채널로 방영한 다큐멘터리 '할미넴'(맹남주·허유리 연출, 송가영 작가)은 지난해 7월부터 11월까지 이들의 모습을 다룬 수작으로 큰 화제를 모았다.  

에미상 결선 오른 '할미넴'… “외국인들이 우릴 봤다고?”

‘할미넴’은 제48회 국제 에미상 다큐멘터리 부문 결선에 올랐다. 에미상은 한해 동안 세계에서 방송된 모든 TV 프로그램을 대상으로 수여하는 상으로 ‘방송계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린다. 후보작 중 아시아 작품은 '할미넴'이 유일하다.


‘머니S’가 오는 23일 에미상 시상식을 앞두고 ‘할미넴’을 공동 연출한 허유리 PD를 만났다.

‘할미넴’을 공동 연출한 허유리 PD. /사진=강태연 기자
허 PD는 ‘할미넴’이 에미상 결선에 오른 데 대해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며 “노미네이트 된 것만으로도 큰 영광"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할미넴 멤버의 반응도 전했다. 허 PD는 "‘할미넴’이 전북권에서 좋은 반응을 얻어 지난 1월 전국 방송으로 나갈 때도 할머니들이 '동네 창피해서 쓰겄냐'고 민망해하셨다"며 "이번 에미상 수상 후보로 올라간 소식을 알리자 '외국인들이 우리를 봤다고?'라며 못 믿겠다는 반응을 보이셨다"고 말했다.

허 PD는 할미넴이라는 아이템을 선정한 기준에 대해 “소재 자체가 아이러니해 눈길이 갔다”며 웃음을 보였다. 그는 “국악원에서 랩 교실을 연 점, 청년이 노인들에게 랩을 가르치는 점, 서울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청년과 순창 토박이 할머니들과의 만남 등 서로 다른 성질이 모일 때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궁금했다”고 말했다.

"할머니들은 땅에서 올라와 노래하는 매미를 닮았어요"

허 PD는 “작품 시작할 때와 할머니들이 살아온 얘기를 하실 때 매미가 탈피하는 장면을 짧게 넣었다”며 “할머니들을 매미에 비유한 것”이라고 귀띔했다.

그는 “보통 7~8년 동안 땅속에서 굼벵이로 살다가 밖으로 나와 몸이 부서지도록 노래하는 매미가 한평생 가족을 위해 헌신하다가 겨우 자기 목소리 한번 내보는 할머니들과 겹쳐 보였다”고 밝혔다.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적어 입으로 내뱉는 과정이 어렵진 않았을까. 허 PD는 “할머니들이 놀랄 만큼 랩 가사를 잘 적으셨다”고 전했다. 그는 “그동안 하고 싶었던 얘기들이 많았는데 기회조차 없었던 것 같다”며 “본인의 이야기를 할 수 있게 해줘 고맙다고 눈물을 보이신 분도 있다”고 말했다.


할머니 래퍼 김영자(75)씨. /사진=KBS 전주방송총국
"랩 선생님 나 인자 못 가 우리 아저씨가 그만 가래
나 혼나 미안해 우리 아저씨 호랭이야"
할미넴의 랩 연습이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박향자 할머니는 남편의 반대로 한달 동안 랩 교실에 나오지 못했다.

허 PD는 “제작진도 많이 당황했다. 영상에 나오진 않았지만 강씨가 직접 박 할머니를 찾아가 한 시간 넘게 설득했다”며 “박 할머니도 랩을 하고 싶은데 남편의 반대가 심해 못 가겠다고 하셨다”고 회상했다.

그는 “드라마틱하게도 박 할머니가 대회 직전 밤 ‘내 이야기는 내 입으로 말해야겠다’며 남편 몰래 연습하러 오셨다”면서 “랩 하는 거 자체가 할머니들한테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는 사실이 새삼 느껴졌다”고 말했다.

허 PD는 힙합을 한마디로 정의해달라는 질문에 “온전한 나를 소개하는 원동력”이라고 답했다. 그는 “할미넴 멤버들은 항상 누군가의 어머니 혹은 할머니로 살았다”며 “랩을 통해 전통 사회에서 여성에게 강요되던 희생과 침묵을 깨뜨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게 됐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강성균씨 또한 랩 교실을 운영하며 장남에게 요구되는 사회적 기준에서 벗어나 자신이 좋아하는 힙합에 확신을 가졌다”며 “‘할미넴’은 출연진들이 온전해지는 과정을 담은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에미상 시상식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여파로 오는 23일 온라인으로 진행된다. 허 PD는 “‘할미넴’ 멤버들을 전주 KBS로 초대해 함께 시상식을 볼 예정”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