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구 대법원 청사. ⓒ News1 박세연 기자

(서울=뉴스1) 박승주 기자 = 범죄 피해금을 인출해주고 수수료를 받기로 약속한 뒤 체크카드를 전달받은 경우 실제 돈을 뽑지 않고 보관만 했더라도 법 위반이라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1부(주심 노태악 대법관)는 전자금융거래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A씨 상고심에서 무죄 부분을 파기하고 사건을 인천지법으로 돌려보냈다고 27일 밝혔다.


A씨는 2020년 9월 성명불상자로부터 "조건만남을 수락한 사람을 협박해 받아낸 돈을 체크카드 2장에 넣어뒀는데, 돈을 뽑아 지정한 계좌로 보내주면 인출금액의 10%를 주겠다"는 제안을 받고 이를 승낙했다.

같은날 A씨는 성명불상자가 보낸 퀵서비스 기사에게 체크카드(접근매체) 2장을 건네받은 뒤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다 잠복 중이던 경찰에 붙잡혔다.

경찰은 SNS에서 보이스피싱 관리자들이 활동한다는 첩보를 입수한 뒤 B씨의 협조를 받아 함정수사를 진행했다. B씨는 성명불상자에게 "인출을 해주면 대가를 주겠다"고 한 뒤 경찰에 제보했고 성명불상자의 제안을 받은 A씨가 현장에 나갔다가 붙잡힌 것이다.


검찰은 "대가를 수수·약속함과 동시에 범죄에 이용할 목적으로 체크카드를 보관했다"며 A씨를 재판에 넘겼다.

전자금융거래법은 대가를 수수·약속하면서 접근매체를 보관하거나, 범죄에 이용될 것을 알면서 접근매체를 보관하면 3년 이하 징역이나 2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한다.

1심은 전자금융거래법 위반을 포함해 사기, 전기통신사업법 위반 등 모든 혐의를 유죄로 판단하고 A씨에게 징역 8개월을 선고했다.

2심에서는 횡령 혐의까지 유죄로 인정돼 형량이 징역 1년2개월로 늘었지만 전자금융거래법 위반 혐의가 무죄로 뒤집혔다.

'인출 대가'로 인출금액의 10%를 수수료로 받기로 했을 뿐 '보관 대가'를 받기로 약속한 것이 아니므로 전자금융거래법이 금지하는 '대가를 수수·약속하면서 접근매체를 보관'하는 경우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판단 때문이다.

재판부는 "체크카드 2장은 경찰과 수사협조자(B씨)가 A씨를 검거하기 위해 미리 준비해둔 것일 뿐 실제 범죄 실행에 직접 사용된 접근매체가 아니므로 '범죄에 이용될 것을 알면서 접근매체를 보관'하는 경우도 아니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대법원은 전자금융거래법 위반 혐의를 다시 유죄로 판단하고 이 부분 사건을 하급심으로 돌려보냈다.

A씨가 받기로 한 수수료가 보관에 대한 직접적 대가가 아니라거나, 실제로는 함정수사였으므로 범죄가 현실화할 수 없다는 이유로 '대가관계'나 '범죄 이용 목적'이 없다고 할 수 없다는 게 대법원 판단이다.

대법원은 "대가를 받기로 약속하고 불법적인 이용을 위해 접근매체를 보관한 경우라면 접근매체 보관에 대응하는 경제적 이익을 약속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판시했다.

금융계좌 불법이용 행위에 관한 대가 약속에는 불법이용을 위한 접근매체 '보관 대가' 약속도 포함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설명이다.

또 "범죄에 이용할 목적이 있는지는 접근매체 보관 당시 피고인이 갖고 있던 주관적 인식을 기준으로 판단하면 된다"며 "미필적 인식이면 족하고, 범죄의 구체적인 내용까지 인식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거래 상대방이 접근매체를 범죄에 이용할 의사가 있었는지, 피고인이 인식한 것과 같은 범죄가 실행됐는지는 고려할 필요가 없다는 취지다.

대법원 관계자는 "범죄 피해금의 인출을 돕기 위해 수수료를 약속받고 접근매체를 받아 보관하는 행위가 처벌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며 "금융계좌가 범죄에 이용되는 것을 근절하고자 하는 전자금융거래법 입법목적이 달성되도록 구체적인 해석기준을 제시했다"고 판결 의미를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