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7일 저녁 남양주의 한 작은 마을에서는 의미 있는 행사가 열렸다. 남양주시 조안면의 슬로시티 지정을 기념해 열린 '수풍(樹風)음악회'다. 행사는 동네 아낙네들로 구성된 '줌마 밴드'의 공연을 시작으로 어린이밴드와 상수원보호구역밴드 등이 차례로 무대에 올라 분위기를 달궜다.

공연이 끝난 후에는 자연스레 막걸리잔이 오갔다. 주민들은 모처럼 마을 돌아가는 이야기와 음악회 준비과정을 이야기하며 농사의 고단함을 달랬다. 행사 관계자는 "이곳으로 귀농한 주민들과 원주민이 함께 공연을 하면서 서로를 알아가는 계기를 마련한 것에 의미가 있다"고 소회를 전했다. 남양주시 조안면은 2010년 11월 지정된 경기도의 유일한 슬로시티다.
 

 
◆25개국 160개의 달팽이 마을
슬로시티는 인구 5만명 이하면서 전통적 수공업과 조리법을 보존하고 고유의 문화유산을 지키며 자연친화적인 농법을 사용하는 도시를 일컫는다. 슬로시티는 1999년 10월 이탈리아에서 시작됐다.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그레베 인 키안티의 전 시장이었던 파올로 사투르니니(Paolo Saturnini)가 뜻이 맞는 몇몇 시장들과 함께 대단위 도시개발 대신 주민들의 정신적 풍요와 여유로운 생활방식을 육성하자고 결의한 것이 시발점이다. 2012년 8월 현재 전세계 25개국 160개 마을이 슬로시티에 가입돼 있다.


'느리게 먹고 느리게 사는 것'이 슬로시티 운동의 기본 원칙이다. 그래서 슬로시티의 상징도 느림의 대명사인 달팽이다. 더불어 작은 것도 슬로시티운동의 가치 중 하나다. 슬로시티를 뜻하는 치타슬로(cittaslow, 도시를 뜻하는 이태리어 citta와 느림을 뜻하는 영어 slow를 합성한 말)에 c를 대문자로 쓰지 않는 이유다. 또 환경을 파괴하지 않고 지속가능하도록(sustailable) 하는 것이 슬로시티의 정신이다. 이들 3개의 가치(slow, small, sustainable)가 슬로시티의 3s 정신이다.

이를 바탕으로 슬로시티는 ▲자연생태를 보호하고 ▲전통문화의 자부심을 가지면서 ▲천천히 만들어진 음식을 먹고 ▲지역특산 공예품을 지키면서 ▲지역민이 중심으로 참여하는 것을 권하고 있다.

슬로시티로 지정된 도시는 어떤 변화가 일어나게 될까. 파올로 사투르니니가 두차례 방한해 가진 인터뷰에 따르면 이탈리아의 경우 마을에서는 인공식품이 사라지고 가정에서는 냉장고가 작아졌다. 콜라 대신 직접 담근 음료를 마시고 신선한 채소를 직접 재배해 먹는다. 심지어 집값도 뛰었다. 주택을 헐고 다시 짓는 대신 개보수를 통해 전통가옥양식을 보존하면서 벌어진 현상이다.


지역특산품이 활성화되면서 지역경기도 살아났다. 슬로시티 발상지인 그레베 인 키안티는 2000년의 역사를 지닌 포도주를 140종으로 상품화 해 매년 큰 수익을 얻고 있다. 피렌체의 그늘에 가려있던 인구 1만4000명의 이 도시를 찾는 연간 관광객은 현재 100만명에 이른다.
 
◆관광객 5년만에 14배 이상 늘었다
 
국내에서 슬로시티로 지정된 곳은 모두 10곳이다. 신안 증도, 완도 청산, 장흥 유치·장평, 담양 창평, 하동 악양, 예산 대흥·응봉, 남양주 조안, 전주한옥마을, 상주 함창·공검·이안, 청송 부동·파천이 순차적으로 선정됐다. 10월이면 제천과 영월에서도 슬로시티가 나온다.
 
이제 선정 5년째를 맞는 슬로시티는 걸음마 단계다. 자립적으로 운영되는 곳은 예산 대흥·응봉 정도가 유일하다. 본격적으로 활성화되지는 않았지만 지방정부의 적극적인 행보는 작은 변화를 만들고 있다. 사라지는 전통문화가 복원되기 시작한 것이 가장 눈에 띈다. 슬로시티본부에 따르면 농사에 쓰이는 쟁기가 복원되고 전통술과 음식, 공예품을 다루는 장인의 수가 늘기 시작했다. 특산품 개발도 진취적이다. 신안 증도는 천일염, 완도 청산은 전복, 장흥 유치·장평은 표고버섯이 특산품으로 명성을 쌓아가는 중이다.

작은 도시의 변화는 관광객 유입으로 이어졌다. 완도의 경우 2007년까지 연간 4만명의 관광객이 지난해 40만명으로 늘었다. 2007년 12월 가장 먼저 4곳이 동시에 슬로시티로 지정된 전라남도는 같은 기간 관광객이 14배나 증가했다.

슬로시티 운동은 돈보다 삶의 질에 가치를 둔다. 때문에 드러내놓고 경제적 가치를 따지지 않는다. 앞만 보면서 달리는 대도시의 삶이 아닌 여유롭고 풍요로운 지방도시를 만들자는 것이 운동의 방향이다. 관광수입이 늘어나는 것은 부수적인 변화라는 게 슬로시티본부의 입장이다.

문제는 자지단체의 재정이다. 슬로시티 후보군의 재정자립도는 20% 미만인 곳이 태반이다. 교부금을 받기위해 지방정부가 중앙정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다. 슬로시티 운동이 정치적으로 이용될 수 있는 여지가 높은 셈이다.
 
"행복은 슬로라이프로부터"
손대현 한국슬로시티본부 이사장
 

사진_류승희 기자
"스마트폰으로 대변되는 빠른 세상의 대척점에 슬로시티가 있습니다."
 
손대현 한국슬로시티본부 이사장은 빠르게 사는 현대인의 삶에 위기가 왔다고 진단한다. 삶의 깊이나 성찰, 철학이 없어지고 물질이 모든 것을 대변하는 시대에 대한 우려다.
 
한양대학교 관광학부 명예교수이자 국제슬로시티연맹의 부회장이기도 한 그는 한국 슬로시티의 산파역할을 한 인물이다. 국내 소도시를 직접 다니며 슬로시티운동의 취지를 설명하고 선정에 영향력을 발휘해 10개의 슬로시티를 탄생시켰다.
 
그는 기자에게 지난 50년간 앞만 보고 달려온 우리 국민이 지금 행복한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국가적으로 경제는 윤택해졌지만 여전히 가계는 궁핍하고 환경적인 손실이 커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국내 2000여가지의 음식이 로열티를 지불하고 있습니다. 음식 주권은 이미 다른 나라에 빼앗겼고요. 우리나라 음식 자급도는 21%에 불과합니다. 대표적인 예로 우리 전통음식인 된장부터 그래요. 유전자가 변형된 콩을 원료로 하는 제품이 태반입니다. 식량파동이나 음식물 안전문제가 생기면 그때는 누가 책임집니까."
 
그는 최근 불어 닥치고 있는 글로벌 경제위기에 대해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말한다. 돈이 너무 빠르게 움직이면서 발생하는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가질 수 있는 기회라는 판단에서다. 익스트림 머니로 대변되는 돈의 노예 시대에서 그는 '느림'이라는 도구를 통해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느림을 실천하려면 사색과 독서, 명상의 시간을 늘리세요. 물론 국가가 정책적으로 여건을 만들어줘야 하지만 말입니다."
 
(Tip) 한국슬로시티본부가 말하는 슬로라이프

 1. 지하철·자전거 타기. 걸어서 출근하기. 제한속도 지키기.
 2. 얼굴에는 항상 웃음을.
 3. 식사시간 즐기기.
 4. 패스트푸드를 멀리하고 제철음식과 에코푸드 먹기.
 5. 명상과 침묵시간 갖기. 아무것도 안 하기.
 6. TV를 멀리하고 독서하기.
 7. 말을 천천히 하고 일도 느리게 하기.
 8. 계단 사용 일상화.
 9. 승강기 느리게 사용하기.
 10. 인생을 나그네처럼 슬로트래블.
 11. 쓰레기 사용 최소화.
 12. 1주일 중 1일은 오프라인·아날로그로 살기.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245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