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항공이 한·미·일 등 군용항공기를 정비하고 보잉이나 에어버스에 부품을 공급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보안시설로 분류된 터라 그간 일반인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해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주요 포털에서 서비스되는 지도에서도 대한항공 테크센터의 자취는 찾을 수 없다. 네이버 지도에는 위성사진 대신 전답으로, 다음 지도에는 그림으로 표시하고 있다.
대지 71만㎡(21만평, 축구장 65배 크기)에 66개 건물이 들어선 테크센터의 주요 공장을 3시간가량 둘러봤다. 마침 KAI(한국항공우주산업) 인수와 항공비전 2020을 발표하며 아시아 최강의 항공우주업체로 성장하겠다는 대한항공의 포부에는 테크센터를 근간으로 하는 항공우주사업본부의 역량에 대한 강한 신뢰가 깔려있는 듯했다.
◆인큐베이터에서 정기검진까지…항공기 종합병원
처음 찾은 곳은 도장공장이었다. 대형 격납고 내에 작업 중인 제품은 단 1대. 대한항공의 중장거리 노선에 투입될 에어버스 A330이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항공산업의 특성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장면이다.
항공기 1대당 도장작업에 걸리는 시간은 통상 4~10일이다. 연간 22~25대만 소화한다. 1998년 준공 이래로 310대가 이 공장을 거쳤다. A330은 9일 일정 중 7일째 작업을 진행 중이었다. 영하 60도와 영상 50도를 오르내리는 온도차를 견디기 위해 고강도 도장을 수행해야 한다.
브리핑룸을 떠나 공장 내부로 들어갔다. 하부 도장을 막 마친 상태였음에도 페인트 냄새가 강하지 않았다. 회사 관계자는 "170개에 이르는 HVU(환기장치)를 장착해 페인트 냄새와 먼지를 크게 줄였다. 아시아에서 유일한 시설이다"면서 "내부 벽면은 준공 이래로 한번도 외벽 청소를 하지 않은 상태"라고 설명했다. 1년도 되지 않은 새 벽처럼 페인트가 전혀 묻어있지 않았다.
민항기 정비공장에 들어서자 보잉 B747-400을 기다리는 철구조물이 위용을 드러냈다. 250개의 행거에 하루 100여명이 투입돼 항공기 정비를 하는 장소다. 이곳에서 1500~2000가지 정비작업을 수행한다고 하니 놀랄 따름이다. 이러한 대형 정비작업을 창정비(창고정비) 혹은 중정비라고 부른다.
군용기 정비공장으로 이동하는 도중 활주로를 통해 오키나와 후텐마 기지에서 막 도착한 수송기 KC130-B를 마주할 수 있었다. 미군의 특수작전에 주로 투입되는 HH60G는 정비를 기다리는지 공장 입구에 자리하고 있었다. 대형 수송기를 통해 알래스카에서 찾아왔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공장 내부에 들어서자 뼈대를 드러낸 군용기가 가득했다. 미자와기지에서 온 F-16과 가데나기지에서 온 F-15 등 주일미공군 전투기가 눈길을 끌었다. 군용기 정비공장 관계자는 이곳을 '항공기의 종합병원'이라고 소개했다. 당장 아프지 않더라도 병원에서 종합검진을 받는 것처럼 예방 차원에서 찾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했다. 물론 알려지지 않은 군사고로 형태가 심각하게 훼손된 기체도 보였다.
부품제조공장에 들어서자 민항기에 장착되는 A320의 각종 부품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곳에서 에어버스의 카고도어를 전량 수주해 제작하고 있다. 연간 1000억원 규모다. 첨단복합재 공장에서는 탄소강화섬유재질로 항공기 전면부를 제작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실패에 실을 감는 형태다. 이 재질을 통해 대한항공은 중량은 가볍고 강도는 강한 기체를 주요 주문처에 공급하고 있다.
F-16 정비장면, 747 정비장면(위부터)
◆제2도약으로 항공산업 키우겠다
테크센터의 시작은 국방이 곧 국력으로 통했던 냉전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4년 11월 북한의 남침용 땅굴이 발견되고 이듬해 월남이 패망하면서 한국 정부는 자주국방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방위산업 육성 정책을 내걸고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을 불러 항공기 생산사업을 추진해달라는 의견을 건넸다. 조 회장은 자서전을 통해 "투자는 크고 수익은 불안한 사업에 사운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국가적 소명이라는 신념으로 사업에 참여했다"고 술회했다. 대한항공 테크센터는 1976년 그렇게 탄생했다.
이후 테크센터는 1977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생산된 헬기 500MD를 시작으로, 1982년 F-5(제공호) 제작, 2004년 무인기 개발, 2005년 보잉787 등 민간항공기 국제공동개발 등 항공분야에서 굵직한 역할을 수행해왔다.
현재 테크센터는 군용기공장, 민항기제조공장, 생산지원공장, 항공기중장비공장, 전자보기정비공장 등 크게 5개로 나뉜다. 분야로 나누자면 제작·정비·연구개발이다.
올해 항공우주사업본부의 예상 매출액은 6000억원. 대한항공 전체 매출이 12조원 이상임을 감안하면 5% 수준이다. 40년 가까이 운영하면서 3000명에 가까운 인력을 투입했지만 여전히 세계시장과의 격차는 좁혀지지 않고 있다. 기술 공유가 어렵고 많은 연구개발이 필요한 분야이기 때문이다. 항공산업에 필요한 필수요소로 자본·기술과 더불어 '열정'을 꼽는 것도 이 때문이다.
본부의 매출 절반 이상은 민항기국제공동개발과 구조물 제작에서 나온다. 53%다. 군용기 제작과 정비, 성능개량 등 MRO 사업이 21%, 민항기중장비분야 11%, 전자보기장비분야 10% 수준이다. 위성이나 발사체 제작 참여로 얻는 매출은 1%인 60억원에 그치고 있다.
본부가 최대매출을 올리고 있는 민항기 개발 및 구조물 제작 분야의 가장 큰 고객은 보잉사다. 이 분야에서 보잉사의 비중은 70%다. 에어버스가 20%를, 나머지 회사가 10%를 차지하고 있다. 항공기 제작분야에서 공동 개발사라는 명함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상 1차 협력업체인 셈이다.
대한항공은 2020년까지 항공우주사업으로 매출 3조원 이상을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현재의 5배 규모다. 그 첫걸음은 23만㎡ 규모의 제2테크센터다. 더불어 항공산업 클러스터 내 상생협력단지도 조성할 계획이다.
대한항공 관계자는 "테크니컬한 부분은 이미 세계수준을 넘어섰다"면서 "문제는 비즈니스다. 내수가 없다는 것은 한계"라고 토로했다. 항공산업시장의 특성상 일정규모 이상으로 덩치를 키우지 못하면 수주의 한계에 부딪힌다는 설명이다. 대한항공이 KAI 인수를 희망하는 또 다른 이유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258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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