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면에 책 한권을 쓰기 위해 오랜 기간 준비를 해온 경우도 있다. ‘이십대의 청년이 가슴에 새긴 꿈을 나이 오십을 앞두고 실현한 긴 여행의 기록’이란 저자의 말대로 무려 30년을 두고 준비한, <문명의 배꼽, 그리스>가 바로 그러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시작은 저자가 삶과 죽음에 대해 고민하던 의과대학생 시절 단골 책방에서 만난 니코스 카잔차키스였다.
저자에 따르면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태어난 크레타 섬에 있는 그의 기념관에 비치된 브로슈어 표지에서 그를 ‘위대한 여행자’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내 삶에 가장 큰 은혜를 베푼 요소는 여행과 꿈’이었다는 니코스 카잔차키스 본인의 말과도 어울린다. 카잔차키스가 작가로서 한 여행의 시작은 바로 그리스였다. 터키령이었던 크레타 섬에서 태어난 그리스인으로서의 불안정한 정체성을 바로 잡는 여행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그는 ‘크레타와 터키’라는 대립구조로 세상을 나눈다. 이 대립구조는 그의 인생 전체를 관통하며 이어진다. 카잔차키스의 삶은 ‘보이는 존재와 보이지 않는 존재, 육체와 영혼, 물질과 정신, 내재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 사색과 행동 등등의, 영원히 모순되는 반대 개념에서 하나의 조화를 창출하려는 끊임없는 투쟁’으로 이루어진다.
저자 역시 비슷한 삶의 과정을 밟아왔다. 인간에게 삶과 죽음처럼 극명하게 대립되면서 갈리는 것이 있을까. 의사를 꿈꾸는 많은 젊은이들은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개념에 당황하고, 그 순간을 일상적으로 보는 인생을 감당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 의과대학생이었던 저자의 가슴에 카잔차키스가 지핀 불꽃이 땅속에서 30년 동안 마그마로 뜨겁게 형성되다가, 결국 이 책을 통해 밖으로 분출하기 시작한다.
이 책은 그 대립항의 조합들이 그리스 땅에서 생성된 연유를 되짚어보고, 현재에 주는 의미를 추출해나가는 과정이다. 저자가 그리스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며 쌓은 지식과, 이번을 포함한 그간 몇 차례 여행에서의 생생한 경험들이 저자가 발을 내딛는 공간을 소재 겸 무대로 하여 펼쳐진다. 이어 자애로운 해설자, 연기력 뛰어난 재연배우, 철학적 화두의 제시자로서 카잔차키스의 다양한 역할이 이어진다. 그 대립들을 정반합(正反合)의 과정으로 풀든, 제로섬으로 인식하든 현재의 의미를 새기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여행은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하고, 항상 눈을 부릅뜨고 찾던 것에 눈을 감을 수 있게 해준다. 고정관념으로 재단해버린 사람이나 지방, 국가에 대해 이면을 보며 다양하게 정의하고 나누며 결국 포용하게도 만든다. 공간을 이동하며 시간의 날줄과 씨줄을 카잔차키스란 능숙한 어부의 도움을 받으며 엮는 저자의 독특한 여행기 방식만으로도 이 책은 매력이 있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268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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