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8년 말 국내 인터넷 동영상서비스시장은 판도라TV(1위)와 다음TV팟(2위)이 양분했다. 두 업체의 시장점유율은 각각 42%와 34%. 그러나 5년여가 지난 지금 이 두 업체의 점유율 수치는 고꾸라졌다. 판도라TV가 4%, 다음TV팟은 8%로 추락한 것. 반면 2008년 당시 2%에 머물며 존재감마저 미미했던 유튜브(구글)는 최근 시장점유율을 74%까지 끌어올렸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관련업계에선 이 '기막힌 반전'의 이유로 '인터넷 실명제'를 꼽는다. 2009년 4월 확대 시행된 이 제도는 일일 방문자 10만명 이상의 인터넷 사이트에 글을 쓰려면 실명확인을 거치도록 한 것이다. 악성댓글을 줄이자는 취지에서 정부가 도입했다.
그러나 지난해 8월 헌법재판소가 위헌 결정을 내리면서 인터넷 실명제는 국내기업과 외국기업의 '운명'만 뒤바꿔놓은 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판도라와 다음을 통해 동영상을 보던 이용자들은 비실명으로 가입할 수 있는 유튜브를 선택했다. 국내 기업이 인터넷 실명제로 인해 규제의 '바운더리'에 묶이는 사이 유튜브는 이용자들의 대대적인 '사이버 망명'을 받아낸 셈. 이로 인해 해외사업자 유튜브는 국내 동영상서비스시장에서 '부동의 1위'로 자리를 굳혔다.
인터넷 실명제의 예에서 보듯, 국내기업을 겨냥한 정부의 규제정책이 외국계기업의 배만 불렸다는 지적이 거세지고 있다. 특히 정부가 '동반성장'이라는 명목으로 중소기업 살리기에 나선 사이 해외기업들의 '새치기' 전략은 더 치밀해졌다.
◆대기업 막으려다 외국기업만 '무혈입성'
2006년 폐지됐다가 2011년 재도입된 중소기업적합업종제도부터가 논란거리다. 국내 대기업이 떠난 '빈자리'에 외국계 대기업들의 무혈입성 사례가 속속 포착된다.
외식업종이 대표적인데 지난 5월 동반성장위원회는 대기업 계열 외식업체에 대해 수도권 역세권 반경 100m밖, 연면적 2만㎡ 미만 복합다중시설에선 신규출점하지 말 것을 권고했다. 이에 따라 CJ계열의 빕스, 롯데계열의 T.G.I.F 등은 새 점포를 내지 못했다. 그러나 외국계 기업인 아웃백스테이크하우스는 규제대상에서 제외됐다.
제조업 분야인 발광다이오드(LED) 조명산업에선 필립스와 오스람 등의 외국계 조명회사들이 국내 시장의 60% 이상을 점유하고 있다. 이 역시 2011년 중소기업적합업종에 LED분야가 지정된 이후 달라진 시장구도다. 최근 중국 시장점유율 1위 업체인 킹선도 오는 2015년 국내에 생산시설을 설립해 연간 1500만달러의 매출을 올리겠다는 목표를 밝힌 터라 국내 중소 조명기업들의 긴장감은 더욱 커지게 됐다.
같은해 중소기업고유업종에 선정된 재생타이어시장의 경우 한국타이어와 금호타이어가 빠진 사이 외국계 기업인 브릿지스톤과 미쉐린타이어가 급부상했다. 두 회사의 올해 타이어 생산량은 2011년 대비 50%나 증가했다.
민간시장뿐만 아니다. 공공사업 영역에서는 외국기업의 '가로채기' 현상이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지난 1월 소프트웨어산업진흥법 시행으로 삼성SDS, LG CNS 등 대기업 그룹의 시스템통합(SI)업체들이 공공입찰을 할 수 없게 되자 그 자리에 IBM, 오라클, HP 등 미국기업들이 속속 진출했다.
특히 소모성자재 구매대행(MRO) 분야에선 연매출 12조원의 미국 대기업 오피스디포가 한국에서는 중소기업으로 분류돼 조달청과 구매대행 계약까지 맺었다. 미국의 2대 사무업체인 오피스디포는 조달청 전국 10개 권역 중 6개 권역에서 향후 2년간 78억원어치를 공급하게 되는데, 이는 공공 MRO시장의 80%에 해당하는 규모다.
이와 관련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 추미애 의원(민주당)은 "중소기업을 살리겠다고 만들어놓은 중소기업적합업종제도가 우리 대기업은 몰아내고, 그 자리에 외국계 대기업을 부르는 허점을 드러냈다"며 "적합업종의 폐해로 시작된 외국계 기업의 진출에 대한 관련 규정 신설과 규제가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상법 개정, 제2의 '소버린 사태' 부추기나
중소기업을 위한 대기업의 사업영역 제한이 단기적인 차원에서 외국기업을 배불렸다면, 최근 기업의 지배구조 개선을 꾀하려는 정부의 상법개정 움직임은 장기적으로 외국기업에 국내기업이 '역차별' 당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를 낳고 있다.
지난 7월 법무부는 기업 지배구조 개선과 관련한 상법개정안을 입법예고하면서 자산규모 2조원 이상 상장회사에 대해 감사위원회·위원을 분리 선출토록 했고 이때 주주의결권을 3%로 제한했다. 이는 최대주주가 50% 지분을 보유하고 있더라도 행사할 수 있는 의결권은 3%로 제한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같은 내용이 발표되자 재계의 반발이 거셌다. 전국경제인연합회와 대한상공회의소, 업종별 연합회 등이 모인 19개 경제단체는 즉각 공동기자간담회를 열고 "상법개정안은 기업의 지배구조를 흔드는 일"이라며 맹비난했다.
이들은 2~3대주주들이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지분보다 상대적으로 더 큰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을 문제삼았다. 외국계 펀드나 연기금 등이 2~3대 주주일 경우 이들의 의결권이 상대적으로 커져 대주주가 경영권 방어에 취약해질 우려가 있고, 이는 결국 국내기업의 역차별을 유발한다는 주장이다.
한국기업의 역차별 논란은 세계적인 헤지펀드인 타이거펀드와 소버린으로 빚어진 과거 '먹튀' 사건에 대한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1999년 타이거펀드는 SK텔레콤 지분 7%를 매집한 뒤 이사파견을 요구했고 적대적 인수·합병(M&A) 위협을 가하는가 하면, 고가로 지분을 인수해줄 것을 요구하다 수개월만에 6300억원의 시세차익을 남기고 떠났다.
2003년에도 소버린자산운용이 SK㈜ 지분 14.99%를 확보해 최대주주에 오른 후 기존 경영진을 압박했다가 1조원의 차익을 얻고는 사라졌다. 영국계 헤르메스펀드 역시 2004년 삼성물산 지분 5%를 매집해 단일 최대주주로 오른 후 삼성물산이 보유한 삼성전자의 지분 매각 등 경영간섭에 나서다가 시세차익만 챙기고 떠났다.
법무부가 입법예고한 상법개정안의 기본취지는 기업 지배구조에서 소외되기 쉬운 소액주주를 보호하고 대주주와 경영진의 전횡을 견제하는 데 있다. 하지만 그만큼 외국계 헤지펀드 등이 '3% 의결권 제한 규정'을 악용해 지분을 쪼갠 후 이를 규합해 감사위원을 선임, 경영권을 장악할 가능성도 늘 도사리고 있다.
온라인·모바일에선 무슨 일이…
외산기업 '땅따먹기' 본격화
앞서 유튜브의 '1위 등극' 히스토리에서도 언급했듯 지금 온라인과 모바일시장에선 외산에 '떠밀리는' 국내기업 사례가 점차 많아지고 있다.
네이버가 운영하는 단문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인 미투데이는 내년 6월말 모든 서비스를 중단한다. TV광고, 스타마케팅 등 많은 투자를 통해 한때 트위터보다 많은 방문자수를 얻었던 미투데이가 페이스북과 같은 글로벌업체에 밀려 운영난을 겪어온 게 배경이다.
SNS뿐만 아니다. 포털사이트, 게임, 오픈마켓, 모바일앱 등에서도 외국기업의 장악세가 뚜렷하다.
지난 9월 구글은 순방문자수(동영상서비스 포함)가 3020만명으로 1위인 네이버 3125만명을 근소한 차로 따라잡았다. 모바일앱에서도 구글의 스마트폰 운영체제(OS)인 안드로이드가 강세다. 국내 모바일앱 순설치자수 상위 15개 앱 중 80%인 12개를 차지한 것. 15개 앱 중 국산 앱은 카카오톡(6위), 카카오스토리(10위), 네이버(14위) 등 3개에 불과하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305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