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지휘 인생 37년을 맞은 금난새씨. 클래식 대중화에 앞장서며 국내 정상급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아직도 이루고 싶은 게 많은 음악가다. 예술감독에서 CEO 겸 음악감독, 그리고 교육가까지. 그가 세상에 내놓은 수식어들은 저마다 스토리를 더하고 해설이 곁들여져 재탄생된다. 그의 도전은 청중과 호흡하는 무대 위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난다.

세계적인 오케스트라 지휘자 금난새씨. 그를 한마디로 규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무겁고 딱딱한 클래식을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음악으로 만들기 위해 그는 지휘자의 자리에 서기도 하고 음악감독으로 변신하기도 하며, CEO(최고경영자) 혹은 교수의 타이틀을 달기도 하기 때문. 그는 말한다. 이 세상은 그 자체로 무대이며,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미래의 청중이라고.


 

/사진=류승희 기자

◆클래식 ‘스토리’있게 비틀기

그에게는 많은 질문이 필요 없다. 그만큼 자신이 걸어온 길에 대한 크고 작은 그림이 넘쳐난다. 마치 일에 대한 재미와 의미를 찾아가는 새내기 아티스트와 같은 모습. 그러나 한편으로는 예술계 대부답게 클래식의 대중화를 이끌며 끊임없이 새로운 길을 개척한다.


“1977년 ‘카라얀 국제 지휘 콩쿠르’에 입상한 후 지휘자로 데뷔한 지 벌써 37년이 됐네요. 시간 참 빠르죠. 돌아보면 그 당시 느낀 게 참 많아요. 저는 지휘자이기도 하지만 청중과 연주자의 중간역할을 매치하는 사람으로서 클래식이 얼마나 생활 속에 들어가야 하는가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것 같아요. 데뷔 후 줄곧 음악적인 면과 대중적인 면을 동시에 고민해온 이유죠.”

교육적인 측면에 집중하는 국내 음악이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뤄내긴 했지만 그만큼 더 음악이 일반 대중에게서 멀어지는 부작용을 가져왔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래서 편견을 깨는 여러 무대를 만들어왔다.

우선 그는 처음부터 2000석, 3000석 공연장에서 시작하는 것이 음악회라는 사회적 통념을 없앴다. 예술의 전당이나 세종문화회관 등 근사한 콘서트홀이 아닌 건물 로비, 야외 공간, 작은 호텔 방과 같이 소수의 관객이 모일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 지휘봉을 들었다. ‘그들만의 리그’라 불리던 클래식에 해설과 스토리를 곁들여 울타리 밖 관객들에게 전한 것도 그가 최초로 시도한 일이다.


“우리 사회가 음악을 대형 공연 위주로 편식한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관객 모집, 좋은 홀과 같은 목적 달성 위주로 음악이 평가되는 게 늘 아쉬웠죠. 무엇보다 저는 음악이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해설을 흥미롭게 해서 많은 청중을 오게 하자’는 게 저의 큰 목표가 됐죠. 청중 없이 각만 잡는 음악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사진=류승희 기자

◆‘최초’에 도전하는 음악발견자

그의 거침없는 도전이 이어졌다. 1992년, 예술의전당에서 최초로 청소년음악회를 열었다. 이듬해엔 해설을 더해 새롭게 재편했다. 초대권을 통한 방문이 아닌 초등학생·중학생들이 2000원씩이라도 내고 음악회를 즐기도록 했다. 이것이 바로 국내 최초로 지휘자가 해설자로 등장, 1999년까지 6년간 전석 매진을 이어온 ‘해설이 있는 청소년 음악회’의 시작이다.

지난 2000년엔 벤처 오케스트라인 ‘유라시안 필 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창단했다. 정부나 지자체 등 제도권의 지원을 한푼도 받지 않는 최초의 자립 오케스트라의 탄생이었다. 이 같은 시도를 우려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그는 벤처정신으로 무장, 공연 장소와 파트너를 찾아 직접 뛰어다녔다. 작은 무대라도 기회가 생기면 더 활기차고 수준 높게 연주했다. 그 결과 창단 4년 만에 100회 연주라는 대기록을 썼다.

“당시만 해도 클래식은 제도권의 보호 아래에서 살 수 있다는 인식이 팽배했죠. 100회 연주라는 것이 정기연주가 하나도 없는 비제도권 오케스트라에게 의미가 남다른 이유예요. 이후 유라시안 필 하모닉 오케스트라에서 코오퍼레이션이라는 회사를 만들어 경영도 함께 했어요. 그 안에 페스티벌을 만들고 아카데미가 있게 했죠. 그걸 계기로 더 여러 가지 일을 하게 됐어요.”

◆세계를 수놓은 감동 선율

이 즈음 그는 또 하나의 성과를 얻어냈다. 2005년부터 시작한 ‘제주 뮤직아일페스티벌’이 그것. 그의 아이디어로 시작된 새로운 형태의 실내악 음악축제다. 이 페스티벌은 창의성을 인정받아 5년 전부터 유럽 페스티벌 협회(EFA)에 회원국으로 등록되기도 했다.

“음악회 일정으로 우연히 들른 제주도였어요. 신라호텔 내 복도에서 단원들과 연습을 하던 게 인연이 됐죠. 호텔 복도에서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선율이 그곳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준거예요. 겨울 비수기에 호텔에서 할 수 있는 음악 프로젝트를 제안 받았고, 제가 답한 것이 실내악 축제였어요. 본래 실내악부터 시작해서 발전한 것이 클래식 음악인데, 그 본질을 살린거죠.”

아이디어 제안 후 그는 세계적인 연주자들을 제주에 초청하고 음악을 사랑하는 기업들을 파트너로 끌어들였다. 그렇게 매년 2월이면 아름다운 제주에 머무르면서 음악을 공유하고 미팅을 갖는 자리가 마련됐다. 해를 거듭할수록 제주 뮤직아일페스티벌은 점점 입소문이 났고 실내악 축제를 요청하는 곳들이 많아졌다.

“2012년 뉴욕에 있는 스타인웨이홀에서 ‘맨하탄 챔버 뮤직페스티벌’을 개최한 것도 같은 맥락이에요. 클래식분야에서도 ‘한류’를 만들어보자는 첫 시도였죠. 문화와 예술, 외교가 어우러진 음악회였어요. 첫회에 반기문 UN 사무총장이 참여해 ‘큰 감명을 받았다’며 이듬해 20명의 대사를 초대하기도 했고요. 이후엔 카페베네 뉴욕브로드웨이 매장에서도 공연을 했어요. 매년 뉴욕에서 새로운 문화 아이콘을 만들어 나갈 생각이에요.”

그의 역할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그는 대학생 연합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이자 국립창원대학교 석좌교수로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으며, 전국 20개 군 단위 지역의 청소년들로 이뤄진 농어촌 희망청소년 오케스트라(KYDO)를 이끌고 있다. KYDO 단원들은 1년에 한번 세종문화회관에서 합동 연주회를 진행한다. 이뿐 아니다. 올해를 시작으로 그의 고향인 부산에서도 매년 페스티벌을 개최할 계획이다.

“국내 음악계 발전 중에 제 몫도 있다는 건 음악시장을 넓히고 청중을 만들었다는 게 아닌가 싶어요. 제가 시작할 땐 아무도 안했지만 지금은 점점 음악의 대중화가 필요하다는 인식에 벤치마킹하는 이들까지 나타나고 있으니까요. 문화를 삶 속에 집어 넣는 일, 그게 제 역할이죠.”




/사진=류승희 기자

◆‘문화 아이콘’… 라움과의 인연

누구에게나 자신을 한길로 걸어가게 하는 힘이 있다. 아마도 그에게는 음악을 통해 만난 작은 인연이 아닐까. 어떻게 보면 그 인연이 ‘금난새표 음악’을 살아 숨 쉬게 만들고 대중의 취향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위치한 복합문화공간 ‘라움’과의 인연도 그중 하나다.

“몇 년 전 지휘를 하러 라움에 들렀어요. 마치 유럽의 작은 마을에 온 듯 한 멋진 건물에 반해버렸죠. 이렇게 멋진 공간을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정말 고마운 마음이 들어 공연 중 ‘그분께 박수를 보냅시다’라고 말했는데, 그 인연으로 라움 예술감독을 겸하게 됐죠.”

예술감독 취임 후 그는 라움에서 다양한 공연을 기획해왔다. 해피 브런치 콘서트뿐 아니라 공연 수익금 전액을 어려운 이웃을 위해 기부하는 ‘라움 체리티 콘서트’, 40인조 페스티벌 오케스트라가 베토벤의 교향곡을 연주하는 ‘베토벤 심포니 여행’까지 규모와 형식도 다채롭다.

“공연장에 앉아 멀리서 들리는 음악만 듣다 끝나는 게 아니라 눈앞에서 연주가 이뤄지고,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주변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고 와인을 마시며 교류하는 게 진짜 음악회라고 생각해요. 라움이라는 좋은 공간을 활용해 더 많은 시도를 할 예정이에요. 이곳에서 새로운 문화가 싹텄으면 하는 게 제 바람입니다.”


/사진=류승희 기자

◆ 낙천적 마인드와 크리에이티브 감성

음악가의 마인드는 ‘큰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음악이라는 것이 수많은 사람과 수많은 과정을 만드는 일이고, 그들이 모여 문화를 만들고 다시 비즈니스라는 산업을 만들기 때문이다.

때론 암초에 부딪히기도 한다. 수많은 도전과 실패, 갈등 요소들 사이에서 흔들리지 않는 방향을 잡고 추진력 있게 일을 이끌어 나가야 하는 책임도 따른다.

“저라고 스트레스가 왜 없겠어요. 하지만 낙천적인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그것이 지금까지 저를 이끌어준 버팀목이기도하고요. 그중에서는 삶에 대한 감사가 커요. 모든 게 잘 안되더라도 살아 있으니 해결할 수 있지 않겠나. 살아 있는 것에 감사하자라고요.”

그에게 음악은 이제 일을 넘어선 그 무엇이다. 그가 만나는 사람들이고 그가 만나는 생각이나 괴롭히는 고민, 혹은 그가 그려온 미래, 꿈이 되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여전히 그는 하고 싶은 일이 많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도 클래식 음악을 위해 새로운 일을 많이 해왔지만 잠자는 분야의 새로운 길을 열어 사람들이 그 길을 이용할 수 있도록 인도하고 싶단다.

“음악을 한다는 건 기술로만 끝날 순 없는 것 같아요. 다양한 걸 흡수해야 하고 창의적이어야 하고 크리에이티브한 감성을 가져야 하죠. 제 해설과 연주를 듣고 나서 많은 청중이 ‘나도 음악을 좋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면 큰 보람이죠. 아직 공개할 순 없지만 조만간 저의 새로운 모습을 또 만나보실 수 있을 겁니다.”(웃음)

클래식 문화의 대중화. 어쩌면 이것이 ‘금난새의 메시지’인지도 모른다. 일에서 느끼는 감성적이고 예술적인 접근과 동시에 그것을 대중성으로 연결하는 비즈니적인 마인드가 적절히 결합하는 이상적인 접점 말이다. 그것은 음악이라는 것이 단순 결과물로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결국 세상은 문화가 바꿔 놓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의 길을 택했다. ‘새로움’, ‘창조’, ‘도전’. 그를 표현하는 많은 수식어를 아우르는 길, 바로 청중의 마음을 얻는 일이다. 그가 밝힌 앞으로의 계획도 마찬가지. 그는 인생에서도 전체를 기획하고 디테일을 놓치지 않는 경영자의 마인드와 아티스트 감성을 함께 지휘할 것이다. 이것이 역사를 수놓을 금난새표 지휘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355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