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이션이 '지니'(램프의 요정)라면 디플레이션은 '오거'(사람 잡아 먹는 괴물)다. 단호히 맞서 싸워야한다."

 
디플레이션(Deflation·경제전반적으로 상품과 서비스의 가격이 지속해서 하락하는 현상)에 대한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의 우려 섞인 경고다. 선진국들의 섣부른 부양축소정책이 자칫 저물가현상을 악화시킬 수 있다는 메시지다.

세계경제에 디플레이션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지난 1930년대 대공황 이후 80년 만이다. 불거지는 신흥국 위기론에 대한민국도 예외가 아니다. IMF 외환위기 이래 가장 심한 저물가 현상을 보이는 한국경제에 경보음이 울리고 있다.

 

/사진=뉴스1 허경 기자

 
◆저물가 현상… 디플레 괴물 부르나


1936년 3월,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도로디어 랭이 촬영한 사진이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캘리포니아 니포모에서 7살 된 딸을 데리고 배급권을 기다리는 32세 여성의 모습이었다. 공허한 눈빛과 무표정한 모녀의 모습은 그 자체로 가혹한 실업과 굶주림이 만연한 대공황의 참상을 전달했다.
 
왜 물가가 떨어지는데 빵을 살 수 없을까. '물가가 하락'하는 디플레이션은 언뜻 보기엔 서민에게 살기 좋은 시기로 느껴진다. 그러나 함정이 있다. 1000원짜리 빵이 500원으로 가격이 떨어진다고 가정하자. 원재료 값이 하락하지 않는 한 빵가게는 500원만큼 이익이 줄어든다. 이익이 줄면 고용한 근로자의 월급을 줄이거나 심지어 해고한다. 그래도 어려울 경우 빵가게는 문을 닫아야 한다.
 
월급이 줄거나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늘수록 소비는 더 꽁꽁 얼어붙는다. 결국 디플레이션의 악순환이 반복되면 가계는 소비가 어렵고 기업은 도산하면서 경제는 큰 불황의 늪에 빠진다. 대공황이었던 1933년 미국의 농업부문을 제외한 실업률은 한때 무려 37%에 이르렀다. 3명 중 1명은 실업자로 거리에 내몰린 셈이다.
 
라가르드 총재가 디플레이션을 사람을 잡아먹는 무시무시한 괴물인 오거에 비유한 이유다. 그렇다면 정말 우리나라에 이런 디플레이션이 몰려오고 있는 것일까.
 
적신호는 낮은 물가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0%대에 그쳤다. 12월 소비자물가는 지난해 같은 달보다 0.8% 상승했다. 2014년 연간 소비자물가지수는 전년에 비해 1.3% 상승했다. 이는 금융위기 직후인 1999년의 0.8% 이후 최저치다.
 
구랍 29일 국회의사당에서는 다소 우울한 주제의 경제 세미나가 열렸다. '2015년 한국경제 디플레이션인가 장기침체인가'라는 주제의 이날 세미나에서 성태윤 연세대 교수는 "디플레이션과 장기침체가 같이 진행되고 있다"고 경고했다. 안동현 서울대 교수는 "기업들은 투자대신 현금을 쌓아두고 가계부채는 늘어 한국은 글로벌 위기에 취약한 상태"라고 지적했다.

정부도 디플레이션을 염두에 두고 대비를 주문한다. 경제사령탑인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취임 직후부터 "한국은 디플레이션 초기 단계에 와 있다"고 우려했다.

 


 
◆가계부채·고령화… 한국형 장기침체 뇌관

현재 한국경제는 대내외 악재에 둘려싸여 있다. 특히 한국경제가 구조적으로 위기에 취약한 허약체질로 변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주 요인은 세계적으로 유례없이 진행된 급속한 고령화다. 통계청이 발표한 장래인구추계 시도편(2013~2040년)에 따르면 전국의 생산가능인구(15~64세)는 오는 2016년 3704만명(72.9%)을 정점으로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해 2040년에는 2887만명(56.5%) 수준으로 떨어질 전망이다.
 
서울(2009년), 부산(1997년), 대구(2011년), 경북(2012년)의 생산가능인구는 이미 지난 2013년 이전에 정점을 찍고 감소하는 추세다. 오는 2040년에는 모든 시도의 생산가능 인구 구성비가 60% 미만으로 낮아질 전망이다. 이처럼 일할 수 있는 국민이 줄면 주택시장은 더욱 침체되고 경제성장률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박성욱 한국금융연구원 박사는 "한국이 고령사회로 진입하면서 앞으로 생산가능인구 감소로 내수수요 기반이 약화되고 물가를 끌어올릴 힘이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1000조원을 훌쩍 넘은 가계부채 역시 소비와 성장의 발목을 잡는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최근 "정부도 다양한 정책을 통해 경기를 살리려 했지만 실물경기가 만족할 만큼 살아나지 못한 것은 구조적 요인이 뿌리깊게 박혀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현재 3% 성장과 1.2~1.3% 수준의 물가를 디플레이션으로 보는 것은 과도하다는 게 한은의 입장이지만 저성장·저물가가 장기화·고착화 될 경우 디플레이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에 저성장·저물가 방지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이 본격적인 출구전략을 시행할 경우 위기 대응능력이 약화된 국내경제는 직격탄을 맞을 수 있다. 안동현 교수는 "미국경기가 혼자 회복하는 상황에서 출구전략을 시행하면 위험은 신흥시장에 집중될 수 있다"며 "한국은 재정확대를 통한 부양정책보다 대외 경제리스크를 관리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365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