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 선운사는 꽃무릇이 한창이다. 붉게 물든 사찰, 화려하게 피어난 꽃길을 걷다 보면 어느덧 도솔암이다. 아련하고 슬픈 전설과 신비로운 이야기가 있는, 눈과 몸이 시원한 선운사 산책길로 떠나보자.
◆ 이룰 수 없는 사랑, 꽃무릇
파란 하늘 아래 꽃길이 붉다. 꽃대는 여리여리한 연두빛에 가까운 반면 꽃은 색이 붉고 짙고 정열적이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보통 꽃에서 기대하는 그런 ‘어여쁨’이 없다. ‘예쁘다’라고 말하기에는 신비롭고 고혹적인 느낌마저 든다. 어떻게 이런 꽃이 엄숙하고 기품 있는 사찰 가까이에 피었을까. 걷다 보면 궁금증이 풀릴 것이다.
보통 상사화라고도 하는데 이는 서로 다른 꽃이다. 잎이 지고 난 후에 꽃이 피는 것이 상사화, 꽃이 진 후 잎이 돋아나는 것이 꽃무릇이다. 색깔도 상사화는 연보랏빛이거나 노란빛이다. 어쨌든 이들은 꽃과 잎이 만나지 못하는 공통된 운명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리움의 정서를 가지고 있다. 이름의 뜻도 ‘꽃은 잎을, 잎은 꽃을 그리워한다’라고 하고, 꽃말은 ‘이룰 수 없는 사랑’이다. 원래는 돌틈에서 나오는 마늘종 모양을 닮았다고 하여 ‘석산화’라고 한다. 마늘종이라니! 애틋해지려던 마음이 갑자기 ‘레드썬!’ 하고 깨어난다.
선운사 가는 길의 꽃무릇은 도솔천이 있어 그 이상의 빛이 난다. 물은 온세상을 다 비추려는 듯 하늘이며 나무며 꽃을 반사한다. 꽃빛이 물에 어른거리는 것이 바람의 빛마저 담아낸 것 같다. 물에 비친 꽃무릇을 보고 있자니 흔들흔들 몽환적인데 손을 뻗어 물에 담그면 시원하다. 또다시 ‘레드썬!’ 이곳 꽃무릇은 사람의 마음을 쥐락펴락 한다.
이 정도면 애틋한 사랑이야기 하나쯤 있지 않을까. 선운사 스님을 짝사랑하던 여인이 상사병에 걸려 죽은 후 그 무덤에서 꽃이 피어났다고도 하고, 사찰을 찾은 처녀에 반한 젊은 스님이 시름시름 앓다가 피를 토하고 죽은 자리에서 꽃이 피어났다고도 한다. 이 사랑은 누가 먼저였든 결국 죽음으로 끝이 난다.
선운사 천왕문.
◆ 계절마다 붉게 물드는 선운사
선운사는 백제 위덕왕 24년에 창건된 천년고찰로 도솔산과 선운산을 배경으로 한다. 경내에 들어서면 멀리 보이는 풍광에 기대감이 생긴다. 과연 호남의 내금강이라는 말이 틀리지 않다. 등산객들이 많아 선운사에서 도솔암을 거쳐 천마봉까지 가거나 경수봉이나 투구바위로 이어지는 코스가 인기다.
사실 이곳은 꽃무릇보다 동백이 유명하다. 대웅보전 뒤편으로 아름드리 동백나무가 있다. 이 중 수령 500년, 높이 6m짜리 동백나무는 천연기념물 제184호기도 하다. 지금은 붉은 동백을 볼 수 없지만 나무 아래 꽃무릇이 보란 듯이 붉다. 그러니까 봄에는 동백으로, 초가을에는 꽃무릇으로, 만추에는 단풍으로 각기 다른 붉은 빛을 자랑한다. 한편 사찰 마당에는 배롱나무 꽃이 만개해 분홍빛 향기가 은근하다. 희한한 일이다. 소박해야 할 것 같은 사찰에 이런 화려함이 웬말인가.
내원궁.
특별히 꽃무릇이 많은 이유는 뿌리의 독성분 때문이다. 인도에서는 이것을 코끼리 사냥용 독화살에 발랐다고 하니 그 독성이 얼마나 센지 알 만하다. 이를 사찰에서는 불화와 절집을 보존하기 위해 사용했다. 단청이나 탱화에 꽃무릇을 찧어 바르면 좀이 슬거나 벌레가 꾀지 않는다고 한다. 가끔 꽃무릇 군락지에 가면 안전띠를 두르고 ‘독성 경고문’을 세운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말이 빈말이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아이와 함께 간다면 함부로 꽃에 손을 대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만세루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다. 이곳에서 신을 벗고 편안히 앉아 차 한잔을 마시고 갈 수 있다. 사찰에 이렇게 편안히 쉴 넓은 공간이 있어 좋다. 게다가 차값도 무료, 사찰의 넉넉함이 여행자에게는 횡재 같은 행복감을 준다.
도솔암 가는 길.
마애여래좌상.
◆ 선운사 여행의 완성, 도솔암
잠깐 쉬었으니 도솔암으로 발길을 옮긴다. 도솔암 오르는 길에도 꽃무릇이 빠지지 않고 피었다. 도솔천을 따라 쌓아 놓은 돌탑도 보고 붉은 꽃빛에 취해 걷다보면 오른쪽에 커다란 굴이 나온다. 이름은 진흥굴, 신라 진흥왕이 왕위를 버리고 수도했다는 곳이다. 일부러 파 놓기라도 한 듯 규모가 생각보다 크다.
진흥굴 앞에는 장사송이 있다. 수령 600여년 된 천연기념물 제354호로 높이 23m, 둘레가 3m나 되는 노송이 꽃무릇 붉은 카펫 위에 장대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가지가 퍼진 모양이 특이해 거대한 한다발의 꽃을 보는 듯하다.
진흥굴과 장사송을 만났으니 도솔암이 멀지 않다. 선운사 창건 당시에는 89개의 암자에서 3000여명의 승려들이 수도했다고 전해지지만 지금은 4개의 암자만 남았고, 이중 여행자들이 좋아하는 곳이 바로 도솔암이다. 이런 절벽 가까운 곳에 암자를 만들고 불상을 새긴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가는 길에 눈을 즐겁게 하는 꽃과 나무는 이곳을 오르는 자가 받는 선물이다.
도솔암 왼편 칠송대에는 보물 제1200호인 마애여래좌상이 양각돼 있다. 불상의 높이는 13m, 폭이 3m로 규모가 큰 마애불상 중 하나다. 머리 위에 있는 구멍은 누각의 흔적이다. 그러니까 예전에는 이 불상에 누각이 있었다고 한다. 이 절벽 바위에 불상을 양각한 것도 대단한데 누각까지 있었다니 감탄이 절로 나온다. 명치에는 네모난 자국이 있다. 이는 감실의 흔적이다. 이곳에 선운산 창건 스님인 검단선사가 쓴 비결록을 넣었었는데, 조선말 전라도 감찰사 이서구가 이 감실을 열자 폭우와 번개가 일어 그대로 닫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 비결록을 19세기 말 동학의 접주 손화중이 가져갔다는 이야기도 흥미롭다.
도솔암 오른편으로 바위를 끼고 오르면 내원궁이 있다. 고통 받는 중생을 구원한다는 지장보살을 모신 곳으로 거대한 바위 위에 세워져 있다. 건물 앞으로 빼곡한 숲이 시원한 바람을 만들고 멀리 올려다 보면 투구봉과 눈이 마주친다. 한편 선운사를 내려다 보는 것도 일품이다. 누구 말처럼 도솔암에 오르지 않고 선운사를 봤다고 할 수가 없겠다.
왠지 모를 뿌듯함을 안고 도솔암에서 내려온다. 붉은 꽃이 지고 나면 단풍이 시작될 것이다. 도솔천은 깊은 가을 빛을 향해 흘러가고 있다.
[여행 정보]
고창 선운사 가는 법
경부고속도로 - 천안논산고속도로 - 당진영덕고속도로 - 서천공주고속도로 - 서해안고속도로 - 선운대로 - 석교교차로에서 ‘법성포, 상하, 선운사’ 방면으로 좌회전 - 선운대로 - 상용터널 - 선운사터널 - 삼인교차로에서 ‘선운사’ 방면으로 좌회전 - 선운사로
[대중교통]
흥덕공용버스터미널 - 농어촌 (해리-흥덕) 버스 승차 - 선운사 정류장 하차
[주요 스팟 내비게이션 정보]
선운사: 검색어 ‘선운사’ /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선운사로 250
선운사
문의: 063-561-1422 http://www.seonunsa.org
선운사 문화유산 해설: 063-560-8687
입장료: 어른 3000원 / 청소년 2000원 / 어린이 1000원
희망 2015 선운문화제
장소: 고창 선운사
일시: 2015년 9월 19일
문의: 063-561-1422
프로그램: 미륵대재, 산사음악회, 박물관 특별전시, 꽃무릇 시화전 등
제 12회 고창 메밀꽃잔치
시기를 잘 맞춰서 고창에 가면 선운사 꽃무릇과 학원농장의 메밀꽃을 함께 즐길 수 있다. 꽃무릇이 열흘 남짓 짧게 피고 지는 것에 비해 메밀꽃은 한달 정도 넉넉하게 볼 수 있다.
장소: 학원농장
일시: 2015년 9월 5일 ~ 10월 4일
문의: 063-564-9897
학원농장 홈페이지: http://www.borinara.co.kr
● 음식
알뜰진미음식점: 장어구이 셀프전문점이자 바지락죽이 유명하다. 선운사지구와 조금 떨어져 있지만 맛집을 찾아 다니는 사람들에게 입소문이 난 곳이다. 장어 택배 주문도 가능하다.
풍천장어 1인분 2만8000원 / 풍천장어 (셀프구이) 1kg 7만원 / 바지락전골 3만원 / 바지락죽 8000원
063-561-6925 / 전라북도 고창군 심원면 하전리 419-2
장어구이: 고창 선운사 일대는 풍천장어로 유명하다. 선운사 진입로에 50여개 식당이 있으니 마음에 드는 곳을 찾아 맛보는 것도 좋겠다.
● 숙소
석정온천휴스파, 힐링카운티: 온천시설을 갖춘 황토펜션이다. 편백나무숲과 고창 황톳길이 있어 편히 쉬는 여행에 더 없이 좋은 숙소다.
예약문의: 063-560-7300 /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석정2로 173 / http://www.huespapension.com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401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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