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 교수 영결식' '신영복'

'우리 시대의 큰 스승'인 신영복(1941~2016) 성공회대 석좌교수가 지난 15일 향년 75세를 일기로 사랑하는 많은 이들의 곁을 떠났다. 사인은 희귀암인 ‘흑색종암’이었다. 일각에서는 햇빛이 귀한 지역에서 발생한다는 이 병이 감옥에서 20년간을 지낸 탓이라고 보기도 한다.


신영복 교수가 감옥으로 들어가게 된 계기는 1968년 통일혁명당사건이었다. 이는 158명이 검거되어 50명의 구속자를 낸 1960년대 최대의 공안사건이었다. 당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김종태가 전후 4차례에 걸쳐 북괴 김일성과 면담하고 ‘통일혁명당’을 결성하여 혁신정당으로 위장, 합법화하여 반정부·반미데모를 전개하는 등 대정부공격과 반정부적 소요를 유발시키려는 데 주력했다”고 발표했다.

신영복 교수는 이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신영복의 활동은 후배들의 독서활동과 세미나를 지도해주는 학생운동 차원이었다. 훗날 신영복은 통혁당에 대해 자신은 전혀 알지 못했고 중앙정보부에 가서야 들었다고 말했다.

20대 후반의 청년 신영복은 감옥에서 생활을 시작했다. 청년을 버리게 된 신영복은 이후 20년간 감옥에서 시간을 보냈지만, “감옥은 나의 스승”이었다고 회고했다. 특히 감옥에서 그가 개발하고 발전시킨 '어깨동무체'라고도 불리는 그의 독특한 글씨체는 한글의 형상미를 독특하게 살리면서도 획과 획, 글자와 글자가 서로 기대는 모습으로 '관계'를 중시하고 흑과 백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인간 사회를 바라보는 그의 사상을 상징한다.

신영복 교수의 일생의 화두는 '공부'였다. 2007년 한 강연에서 그는 '무릇 대학생활은 그릇의 내용을 채우는 것이 아닌 그릇 자체의 크기를 키워야 하는 시기'라고 말했다. 그가 생각하는 공부의 방식은 지식을 넓히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깨닫는 능력을 높이는 것이었다. 또한 어리석은 듯이 보이는 꾸준한 공부가 사람을 바꾸고 세상을 바꾼다고 보았다.

'신영복 교수' /자료사진=뉴스1(도서출판 돌베개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