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열리는 모터쇼의 방향성은 꽤나 현실적이다. ‘실용’을 앞세우는 건 기본이고 당장에라도 탈 수 있는 차 위주로 전시된다. 현실과 동떨어진, 미래지향적 차들이 많았던 예전의 모습과 비교하면 크게 달라졌다. 지난 1일(현지시간) 스위스 제네바에서 막을 올린 ‘86회 제네바모터쇼’도 이런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사진제공=현대기아자동차

◆ 세계의 이목 집중된 제네바

올해 제네바모터쇼는 30개국 200개 회사가 참가해 120대의 월드프리미어(World Premiere: 세계최초공개차종)와 유럽프리미어(Europe Premiere: 유럽최초공개차종)를 쏟아냈다.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자동차 강대국에 둘러싸인 지리적 특성 덕에 스위스가 자동차 생산국이 아님에도 매해 약 70만명이 찾는 세계 5대 모터쇼 중 하나로 꼽힌다.

제네바는 국제정치·금융·상업의 중심지이자 세계적인 휴양지다. 부자들이 자주 찾는 곳 중 하나여서 제네바모터쇼에선 이들을 겨냥한 럭셔리카는 물론 슈퍼카들도 대거 출품된다. 대규모 완성차업체부터 소규모 디자인 공방인 카로체리아(carrozzeria)들의 적극적인 참여도 눈에 띈다. 규모 면에선 여타 모터쇼에 비해 큰 편이 아니지만 “질적으로는 세계 최고”라고 언급되는 이유다.


◆ 고급스럽거나 강하거나

값을 매기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자동차는 갑부들의 사냥감이다. ‘남과 다름’을 드러내고픈 이들을 위해 벤틀리는 '뮬산 그랜드 리무진 by 뮬리너'(Mulsanne grand limousine by Mulliner)라는 특별한 주문생산방식 모델을 내놨다. 기존 뮬산과 비교해 길이가 1m 늘어났고, 높이는 79mm 높아졌다. 뮬리너는 벤틀리의 맞춤 제작 부서다. 벤틀리는 이 차를 두고 럭셔리, 장인정신, 맞춤제작과 정교함의 결정체라고 자평했다.

BMW는 세계 최초로 공개한 ‘M760Li xDrive’를 통해 플래그십 라인업 7시리즈에 고성능 버전을 추가하며 ‘역동’을 강조하는 회사의 철학을 이어갔다. ‘고급스러움’과 ‘강함’이라는 두 가치를 모두 원하는 사람을 겨냥했다. 최고출력 600마력을 내는 M 퍼포먼스 트윈파워 터보 12기통 가솔린 엔진을 장착했으며 뛰어난 주행성능과 최상의 승차감을 결합해 럭셔리의 새 기준을 표현했다는 게 회사 측의 설명. 정지상태에서 시속 100㎞까지 도달하는 데 겨우 3.9초가 걸린다.


/사진제공=벤틀리
/사진제공=BMW

이와 함께 특히 전통의 슈퍼카제조사는 ‘여럿이 함께, 어떤 길이든 달릴 수 없다’는 한계를 넘기 위한 시도를 이어갔다. 이번 모터쇼에서 페라리는 4인승, 사륜구동 GT 스포츠카 ‘GTC4루쏘’(GTC4Lusso)를 세계 최초로 공개했다. 그동안 오로지 주행성능을 끌어올리기 위해 많은 불편을 감수했지만 이제는 실용을 더해 조금 더 대중에게 다가서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소수의 마니아가 아니라 누구든 탈 수 있도록 만들겠다는 의지다. 이 차를 타면 네 명이 함께 시속 335㎞까지 달릴 수 있다.


◆ 대세는 SUV… 친환경은 기본

럭셔리카브랜드나 슈퍼카브랜드들의 움직임은 SUV로 이어졌다. 브랜드만의 특성과 철학에 ‘다양한 목적으로 쓰기 위해 만들어진 자동차’라는 의미를 녹여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차를 만들기도 했다. 험한 길을 내달리는 정통 SUV보다는 고급스럽고 편하면서 강력한 성능을 뿜어내는 쪽으로 초점이 맞춰진셈이다.

럭셔리카브랜드 벤틀리가 처음 내놓은 SUV ‘벤테이가’(Bentayga)도 그 중 하나다. 지난해 9월 독일 프랑크푸르트모터쇼에서 데뷔했고, 이달 말 첫 번째 소비자에게 인도될 예정이다. 마세라티는 브랜드 최초의 SUV '르반떼'(Levante)를 이번 모터쇼에서 세계 최초로 공개했다. 두 차종 모두 첨단 기술과 강력한 성능, 고급스러움에 ‘편리’를 더한 게 특징이다.

양산 브랜드들이 내놓는 SUV는 성능이나 효율을 높이면서 개성을 더해 틈새시장을 공략하려는 차종이 많다. 폭스바겐은 컨버터블의 장점과 SUV의 활용성을 합친 소형 오픈탑 SUV ‘티-크로스 브리즈'(T-Cross Breeze)를 내놨다. SUV시장 확대에 대응하기 위해 내놓은 이 회사의 전략모델 중 하나다. 푸조도 대표 소형 SUV 2008의 얼굴을 고쳤다. 다양한 노면에서 안정적인 주행에 도움을 주는 그립컨트롤 기능도 넣었다. 아우디는 Q2를 앞세워 BMW X1, 메르세데스-벤츠 GLA와 경쟁을 예고했다.

국내업체도 흐름에 동참했다. 현대자동차는 아이오닉(IONIQ) 삼총사를 앞세웠다. 지난 1월 국내 출시한 하이브리드(HEV) 모델에 이어 세계 최초로 플러그인 하이브리드(PHEV)와 전기(EV) 버전까지 공개했다. 기아차도 하이브리드 기반의 소형 SUV 니로(Niro)를 유럽시장에 처음 선보였다. 쌍용차는 실내와 트렁크 공간을 넓힌 소형 SUV 티볼리 에어(TIVOLI Air, 현지명 XLV)를 출품했다.

◆ 실용주의는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

 

모터쇼는 단순히 자동차를 전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행사가 열리는 나라의 정치·경제·사회·문화를 담아내는 복합체다. 그럼에도 비교적 현실적인 자동차들의 출품이 많았다는 건 당장 먹거리를 놓치지 않으려는 업체들의 깊은 고민이 내놓은 결과물인 셈이다.

수입차업계 한 관계자는 “이젠 시장이 필요로 하는 제품이 아니면 팔기 어려운 시대”라며 “다품종 소량생산에 대응하지 못하면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라고 전했다. 이어 그는 “대부분 업체들의 관심사는 틈새시장을 공략하거나 새로운 시장을 만드는 데 쏠려있다”고 덧붙였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426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