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대 직장인 윤모씨는 최근 나드리화장품에서 걸려온 전화 한통을 받았다. 신제품 론칭 기념으로 고객들에게 화장품 무료 샘플을 제공한다는 내용. 상담원은 “50~60대 고객들을 대상으로만 하는 특별 이벤트”라며 비용 부담이 일절 없는 ‘무료’임을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무료라는 말에 솔깃해진 윤씨는 샘플을 써보기로 하고 며칠 뒤 제품을 택배로 받았다. 하지만 뜯어본 택배상자에는 샘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윤씨는 대표이사 명의의 인사말과 함께 첨부된 안내문을 뒤늦게 본 뒤 자신이 아무 생각 없이 59만8000원 상당의 정품을 개봉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놀란 윤씨는 부랴부랴 본사와 전화통화를 시도했으나 몇번을 전화해도 통화연결이 되지 않았다.
#. 60대 주부 김모씨도 같은 전화를 받고 비슷한 경험을 했다. 김씨는 당연히 무료 샘플이겠거니 생각하고 제품을 뜯어 사용하다 2주 뒤 나드리화장품으로부터 정품 개봉 시 50% 할인된 가격인 29만8000원을 결제해야 한다는 전화를 받았다. 김씨가 “무료로 샘플을 보내준다고 해서 쓴 것 아니냐”고 되묻자, 상담원은 “‘앰플’을 ‘샘플’로 잘못 알아들은 것”이라며 사용한 부분에 대한 결제를 요구했다. 김씨는 “계속 돈을 못 내겠다고 버티니 그쪽에서 나중에는 특별히 1+1로 정품을 하나 더 보내주겠다고 하더라”며 “써보니 화장품이 나쁘진 않던데 나이 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이런 식의 장사를 해서 되겠냐. 크림 한통에 30만원 하는 것도 말이 안된다”고 꼬집었다.
1990년대 국내 화장품시장을 주름잡던 토종화장품브랜드 나드리화장품. 4년 전 최종 부도처리된 이곳이 최근 ‘무료 샘플 사기’, ‘화장품 보이스피싱’이라는 말들로 주부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다.
◆ ‘무료 샘플’에 가려진 298000원의 덫
뷰티 및 관련업계에 따르면 최근 서울·수도권을 중심으로 나드리화장품 사기 전화를 받았다는 피해사례가 급증했다. 화장품 샘플을 무료로 보내주겠다며 주소를 알아낸 뒤 고가의 정품을 샘플과 함께 보내 뜯게 한 후 대금을 청구하는 사기성 강매를 펼친다는 주장이다. 피해자들은 대부분 50~70대.
이 수법은 사실 몇년 전부터 음지에서 유행한 판매 방식이다. 당시 소비자보호원 등을 통해 피해사례가 접수되고 대처방법이 알려지면서 잠잠해졌으나 최근 '무료'와 '샘플'이란 단어에 약하고 소비자보호법, 인터넷 사용 등에 둔감한 40~70대 여성들을 대상으로 다시 활개를 치는 것이다.
최근 몇달 새 인터넷 뷰티 커뮤니티나 블로그에는 ‘무료 샘플체험 조심하세요’, ‘나드리화장품 신종 사기’ ‘중장년층 대상 샘플 강매 주의보’ 등의 글이 자주 등장한다.
피해자 이모씨의 딸은 “우리 엄마는 안내문을 먼저 읽어 정품을 개봉하지 않았지만, 전화상으로는 그냥 샘플을 보내주겠다고만 안내받았으니 제품을 개봉하는 일이 자연스러웠을 것”이라며 “나중에 주변에서 같은 사례로 60만원을 날렸다는 얘기를 듣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고 말했다.
30대인 한 블로거는 “얼마 전 무료 샘플을 주겠다는 전화를 받았는데, 갑자기 나이를 묻더니 30대는 체험 대상이 아니라고 하더라”며 “40~50대를 대상으로 하는 행사라면서 어머니나 친구분들 이름과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해 황당했다"고 전했다.
실제 해당 화장품업체는 전화 통화 시 “40~60대를 겨냥한 화장품”이라며 나이를 확인한 뒤 중장년층에게만 샘플을 가장한 정품을 보내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고객이 정품을 개봉한 뒤 반품을 신청하거나 항의하면 “개봉했으니 입금해야 한다”, “청약철회기간 2주가 지났다”는 등 법적 제도를 운운하며 독촉 전화를 하는 식이다.
화장품을 개봉하지 않고 반품하려 해도 30~40분 동안 상담원이 전화를 끊지 않고 구매를 강요하거나 택배비를 요구하는 사례도 있다. 문의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으나 통화 연결이 안돼 청약철회기간인 2주가 지났고 울며겨자먹기 식으로 제품을 구매했다는 피해자도 있었다.
◆ “듣고 싶은 것만 들은 고객 탓… 강매 없었다”
업체 측은 이 같은 논란에 대해 샘플 마케팅의 일환일 뿐 사기도 강매도 없었다고 선을 그었다. 나드리화장품 한 관계자는 “샘플체험 전화를 하면서 본품과 함께 보낸다는 고지를 하고 있으며 나중에 본품을 회수해간다는 안내도 하고 있다”면서 “그 말에 동의한 고객에 한해 제품이 배송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 관계자는 “(강매·사기 논란에 대해) 고객이 본품 고지를 제대로 듣지 않고 듣고 싶은 부분만 들었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발생한 것”이라며 “샘플체험은 지난해 말부터 진행된 마케팅의 일환으로 40~60대를 대상으로 하는 것은 과거부터 이어온 나드리화장품의 타깃층이 해당 나이대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전문가들은 그러나 법정 소송까지 가기엔 다소 모호한 ‘29만8000원’을 청구한 뒤 피해자들이 자포자기식으로 구매하게 만드는 전형적인 강매수법이라고 지적했다. 소비자연합회 한 관계자는 “반품 요청에 상담원이 모르쇠로 일관하거나 전화통화가 안될 경우엔 청약철회서를 작성해 제품 발송 회사(제품 수령시 기재된 발송자의 주소)에 내용증명으로 보내면 된다”며 “이 같은 피해를 막기 위해선 무료라는 말을 한번쯤 의심해봐야 한다. 또 제품을 받았다면 성급히 개봉하지 말고 안내문 등을 꼼꼼히 읽어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한때 잘 나가던 나드리화장품은 1979년 한국야쿠르트가 설립한 회사다. 처음에는 야쿠르트화장품이라는 사명을 썼지만 1990년 나드리화장품으로 사명을 바꿨다. 1990년대 나드리화장품의 인기는 대단했다. 한국화장품·한불화장품과 함께 국내 화장품시장 빅3로 분류됐다. 이노센스, 메소니에, 헤르본 등 다양한 브랜드를 히트시키며 한 때 연간 1000억원의 매출을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도 잠시, 이 회사는 1997년 외환위기 직격탄을 맞고 급격히 사세가 쪼그라들었다. 수입 화장품과 초저가 브랜드숍에 밀려 점차 순위권 밖으로 자취를 감췄다. 급기야 2006년 대상그룹 계열사인 유티씨인베스트먼트에 매각되는 등 경영권에 변동을 겪다 2012년 최종 부도처리됐다.
이후 개인투자자와 인수합병을 체결하며 채무를 변제, 2013년 6월 부도 16개월 만에 회생절차를 종결했다. 그해 11월 나드리화장품에서 시크리티스로 상호를 변경한 뒤 다시 한번 재기를 노리고 있다.
뷰티업계 한 관계자는 “잊혀졌던 토종브랜드의 부활은 반길 만한 일이지만 ‘사기’와 ‘강매’라는 단어가 난립하는 것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기업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면서 “잠시 단기 수익을 올릴 수 있다고 해도 한번 낙인 찍힌 부정적 이미지는 쉽게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432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