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하고 부드러웠다. 주차장을 빠져나갈 때 느낌은 마치 하이브리드자동차를 탄 것처럼 고요했다. 고속도로를 질주하거나 구불구불한 국도를 달릴 때는 출렁임 대신 단단함이 앞섰다. 한층 노련해진 6세대 그랜저를 통해 현대자동차의 고심을 충분히 엿볼 수 있었다.


지난달 25일 서울 워커힐호텔과 홍천을 오가는 약 150km구간에서 고속도로와 국도를 달리며 신형 그랜저를 시승했다. 시승차는 모든 선택품목이 추가된 3.0 최고급형.


그랜저(IG) 주행사진. /사진제공=현대자동차

◆‘젊은’ 그랜저로 재탄생

신형 그랜저의 핵심은 디자인이다. 내외관 스타일링에 많은 공을 들인 티가 난다. 특히 자동차의 그릴을 포함한 앞모양은 첫인상을 좌우하기 때문에 자동차디자이너들이 특히 신경쓴다. 새로운 그랜저는 신형 i30에서 소개한 적 있는 ‘캐스캐이딩 그릴’을 적용했다. 디테일은 조금 다르지만 큰 윤곽은 비슷하다.
그릴 가운데 박힌 현대의 H로고 사이즈가 2배쯤 커진 점도 눈여겨볼 포인트다. 로고 뒤편엔 어드밴스드스마트크루즈컨트롤(ASCC)시스템의 레이더가 숨겨져 있다. 앞으로 현대는 새로 출시되는 자동차에 큰 사이즈의 로고를 넣을 계획이다. 커진 로고는 자신감의 표현이며 세계적인 추세다.

옆모양은 신형의 특징을 제대로 드러낸다. 차 크기는 구형과 거의 차이가 없지만 비례감이 달라져 더욱 안정적이고 멋스럽게 느껴진다. 구형은 승객의 탑승공간이 차의 가운데 위치한 디자인이어서 날렵하고 빠르게 보인다. 반면 신형은 보닛이 길고 트렁크리드가 짧으며 루프라인은 유려하게 뒤로 흐른다.


앞바퀴굴림(전륜구동, FF)방식의 구조적 한계로 프론트 오버행(앞바퀴부터 앞범퍼까지의 거리)을 더 이상 줄이기 어렵지만 최대한 뒷바퀴굴림(후륜구동)차처럼 보이도록 디자인한 점은 높이 평가할 부분이다. 차 아랫부분엔 크롬 띠를 둘러 멋을 냈다. 시각적 안정감을 더하는 요소다.

뒷면은 신형 그랜저 디자인의 하이라이트다. 날개를 펼친 형상의 웅장한 디자인을 추구한 구형과 달리 신형은 부드러우면서 탄탄한 뒤태를 표현했다. 특히 양쪽 테일램프와 그 사이를 지나는 LED 리어콤비램프는 한번 보면 잊기 어려울 만큼 강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인테리어는 한결 단정해졌다. 먼저 디스플레이 화면과 조작버튼 영역을 분리하고 조작부 내의 멀티미디어와 공조버튼도 구분해 배치했다. 다만 모든 버튼의 감촉이 같아서 운전 중 느낌만으로 조작하기 어렵다는 점은 아쉽다. 중간 버튼에 키보드의 돌기(F와 J 자판에 튀어나온 부분)처럼 감각으로 인지할 수 있는 장치를 넣으면 좋을 것 같다. 손이 닿고 시선이 머무는 곳의 소재를 고급화한 점은 칭찬할 만하다.


그랜저(IG) 내부 인테리어. /사진제공=현대자동차

◆단단한 승차감, 오너드리븐카로 변화

신형 그랜저는 운전이 편하다. 서스펜션은 유럽산 자동차처럼 단단히 세팅돼 차체가 흔들리지 않게 잡아줘서 다루기가 쉽다. 차가 긴 편인데도 뒷부분이 따로 놀지 않고 잘 따라붙어 빠르게 몰 때도 안정감이 좋다. 게다가 앞유리와 옆유리 사이의 기둥인 A필라는 시야를 가리지 않게 디자인돼 굽은 산길에서도 충분히 ‘코너링’ 실력을 발휘할 수 있게 돕는다.
사진으로 볼 땐 툭 튀어나온 8인치 내비게이션의 위치가 어정쩡하게 느껴지지만 운전석에 앉았을 땐 생각 이상으로 편하다. 운전을 하며 앞을 바라보다가 내비게이션 화면을 보기 위해 시선을 이동하는 거리가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크루즈컨트롤 기능을 켜면 운전이 한결 편해진다. 주변 차와 거리를 조절해가며 설정해둔 속도를 유지한다. 이 기능이 활성화되면 카메라 단속구간에선 스스로 속도를 낮춘다. 앞차만 졸졸 따라가는 게 아니라 교통환경에 따라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모습이 이채롭다.

시승한 가솔린 3.0ℓ 모델은 8단 자동변속기와 맞물려 최고출력 266마력(ps), 최대토크 31.4kg·m의 힘을 낸다. 가속페달에 힘을 주자 거침없이 앞으로 튀어나간다. 구형의 270마력, 31.6kg·m보다 수치가 낮아졌지만 힘을 낼 수 있는 영역이 실사용구간에 가까워 실제 운전할 땐 훨씬 역동적으로 느껴진다.

가속 시 엔진 사운드는 듣기 좋다. 그동안 현대차 특유의 과장된 부밍음 대신 유럽산 자동차의 절제된 기계음에 가까워졌다. 주행 중 소음도 잘 억제됐다. 소음차단효과가 좋은 라미네이트글라스(유리 2장을 붙인 고급유리)는 앞좌석 창문에만 적용됐다.

신형 그랜저는 운전의 재미가 커진 만큼 차의 중요도 또한 앞좌석으로 이동했다. 뒷좌석과 앞좌석에 번갈아 앉아보면 차이를 확실히 느낄 수 있다. 뒷좌석보다 앞좌석이 조용하고 편안하다는 의견을 낸 사람이 적지 않다.

뒷좌석은 헤드룸을 확보하기 위해 엉덩이가 닿는 부분을 얇게 만들었다. 지붕에서 트렁크로 이어지는 선이 완만히 늘어지는 쿠페형 디자인 탓에 뒷좌석 머리공간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노면의 충격이 솔직하게 전달된다. 반면 앞좌석은 안락하면서도 몸을 단단히 지지해줘서 피로감이 적다.


그랜저(IG) 디자인. /사진제공=현대자동차

◆올라운드플레이어, 그랜저

그랜저는 대형차의 상징이자 현대차의 자존심이다. 그런 그랜저가 아우들의 놀이터인 중형차시장을 기웃거리는 중이다.
이는 중형차시장에 르노삼성의 SM6나 한국지엠의 쉐보레 말리부처럼 강력한 경쟁자가 등장한 것과 관련이 있다. 두 업체는 1위인 쏘나타의 시장이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방향을 바꿔 틈새를 공략했다. 이런 전략은 쏘나타의 아성을 위협할 만큼 성공적이었다.

현대차 입장에선 쏘나타의 상품성을 더욱 높이는 게 급선무지만 갑자기 신차를 내놓기엔 많은 무리가 따른다. 이에 결국 형님인 그랜저가 3.0ℓ 대신 2.4ℓ 엔진을 주력으로 삼고 체급을 낮춰 동생을 지원하고 나섰다. 3055만원부터 시작하는 2.4ℓ 그랜저는 분명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성격변화는 그랜저보다 상위 차종이지만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한 아슬란의 포지션을 바로잡는 역할도 한다.

그렇다고 준대형시장을 포기한 건 아니다. 내년엔 하이브리드와 가솔린 3.3ℓ 라인업을 추가하면서 본격적으로 굳히기에 나선다.

6세대 그랜저는 진정한 올라운드플레이어로 거듭났다. 패밀리카로서의 탄탄한 기본기를 갖췄고, ‘코너링’ 실력도 수준급이어서 누구나 즐겁고 편하게 몰 수 있다. 운전자의 주행성향에 맞춰서 힘을 더 주거나 빼는 스마트 주행모드는 효율과 퍼포먼스라는 상반된 요소를 모두 만족시켜준다. 여기에 현존하는 첨단 안전장비를 잔뜩 집어넣은 ‘현대 스마트 센스’ 패키지도 운전자를 미소짓게 만든다.

☞ 본 기사는 <머니S>(www.moneys.news) 제465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