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퉁, 탕, 퉁, 탕’

서울 은평구 수색역 인근에 위치한 대장간에서 경쾌한 망치질 소리가 들려온다. 고속철이 분주히 오가는 역 주변 대로 한켠에 덩그러니 위치한 이 대장간의 이름은 ‘형제대장간’. 10평 남짓한 공간에 낫, 호미, 갈고리, 집게 등 철로 만든 도구가 켜켜이 쌓여있다.

지금은 찾아보기 어렵지만 예전엔 대장간이 많았다. 기계로 찍어낸 중국산 도구가 활개를 치면서 수많은 대장장이가 사라졌다. 저렴한 중국산 물량공세에도 형제대장간이 버틸 수 있던 것은 50여년간 대장장이 업을 이어온 형 류상준씨(64)의 장인정신 덕분이었다.


상준씨와 동생 류상남(61)씨 형제는 20년간 불 앞에서 씨름하며 형제대장간을 지키고 있다. 낮 최고기온이 30도를 넘어서던 지난 4일 오후 푹푹 찌는 가마솥 더위 속 활활 타오르는 화덕 앞에서 작업에 매진하는 류상준·상남 형제를 만났다.

“쇠에도 다 태생이 있어요. 칼 될 놈, 호미 될 놈, 숟가락 될 놈…. 다 다르죠. 이걸 잘 구분해야 하는데 낫 될 놈은 너무 강해선 안 되고 칼 될 놈은 너무 물러선 안 돼요. 낫은 쇠가 너무 강하면 작업할 때 부러질 수 있어서 살짝 유연해야 하고 칼은 뭉그러지지 않고 날카롭게 만들 수 있도록 단단한 쇠가 좋죠.”

사진=임한별 기자

◆달구고 두드려 천년의 기술 ‘뚝딱’  

형인 상준씨는 도구가 되기 전 쇠의 근본을 이렇게 설명했다.


상준씨가 화덕에서 벌겋게 달아오른 쇳덩이를 꺼내 모루 위에 올렸다. 상준씨는 동생 상남씨와 함께 쇳덩이를 해머로 ‘쿵쾅쿵쾅’ 메질했다. 이어 쇳덩이를 물속에 넣어 식힌다. 담금질을 거듭할수록 쇠는 더욱 강해졌다. 벌겋게 달군 쇳덩이를 두들기고 다져 새로운 도구로 만들어낸다. 2000도가 넘는 뜨거운 화덕 앞에서 상준씨와 상남씨는 쉴 새 없이 메질을 했다.

“대장간 일이 원래 이렇게 시끄러워요. 쇠를 달구고 두드리고 담금질하는 삼박자가 맞아야 해서 한눈 팔수가 없어요. 사실 이렇게 만드는 게 옛날식이죠. 워낙 저렴한 중국제가 많이 나오다 보니 이런 전통식 도구를 굳이 살 필요는 없지만 좋은 거 찾는 사람은 여기 와서 주문해요. 중국에서 만들었다고 다 나쁜 것은 아닌데 진짜 좋은 도구는 주물로 만드는 중국제가 아니라 이렇게 망치로 두드려 만든 거예요.”

상준씨는 13살 나이부터 쇠를 다루기 시작했다. 그땐 눈만 뜨면 쇠망치를 잡았다. 이제는 쇠를 다룬지도 50년이 넘었다.

“모래내대장간 영감이 제 스승인데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양반이에요. 선생이 불 속에 쇠를 넣으면 호미, 낫 등을 뚝딱 만들어내는 데 그게 그렇게 신기했어요. 당시엔 용접이란 게 없었으니 불만으로 도구를 만들어내는 것 자체가 대단한 거죠. 배울 때 불길 못 맞춘다고 엄청 혼났어요. 불은 뜨거운데 고무신이 흘러내려서 새끼줄로 발목을 칭칭 동여매고 일하느라 애먹었죠.”

상준씨의 스승은 서대문구 남가좌동 모래내대장간 주인이었던 박용신씨다. 그는 2004년 여든 두해로 생을 마감했다. 박용신씨 밑에서 일을 배운 상준씨는 암사동으로 옮겨 대장간을 운영하다 20년 전 이곳 수색동에 자리를 잡았다. 동생 상남씨가 합류하면서 상호도 ‘형제대장간’으로 정했다.

상남씨는 20년 전 하던 사업이 여의치 않아 고민하던 차에 형 상준씨의 제의를 받아 대장간에서 일하게 됐다. 자리만 잡으면 언제든 다시 사업을 시작하겠다고 마음먹은 지 어느덧 20여년. 상남씨도 형의 길을 따라가고 있다.
 
◆50년의 담금질… 20년의 두드림

“1996년에 형이 저보고 여기서 장사라도 하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장사만 할 수 있나요. 돕다 보니 대장간 일을 같이 하게 된 거죠. 2000년대 초반에 다시 장사를 시작했는데 건너편에서 가스폭발 사고가 나서 파편을 맞았어요. 병원에 6개월 정도 입원할 정도로 몸이 많이 망가져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죠. 어쩔 수 없이 다시 형을 돕게 됐는데 여기서 일을 하다 보니 재활이 되더라고요. 그때 느꼈어요. ‘나는 다른 거 하면 안되나 보다. 이 일이 천직인가 보다’라고요.”

형제는 다툴 때도 많았다. 상준씨의 완벽주의 때문이다. 상남씨는 “형이 장인 특유의 고집이 있다”며 “돈 생각 전혀 안하고 오로지 도구 만드는 데만 신경쓰다 보니 옆에서 보기에 답답한 면이 있다”고 말했다.

“형은 도구에 작은 흠이라도 보이면 내동댕이쳐요. 장사꾼 기질이 있는 저로서는 속이 터지죠. 하나를 붙들고 본인 마음에 들 때까지 계속 만드는 형한테 시간도 없는데 제발 정도껏 하라고 말할 때도 많았어요. 그래도 그만큼 형이 도구를 완벽하게 만들어내니까 우리 도구 한번 써본 손님은 다른 데 못 가요. 사극드라마에 나오는 횃대(횃불), 칼 같은 도구들도 여기서 만든 거예요. 경기가 안 좋아도 수요가 꾸준하다 보니 타격이 거의 없어요.”

문화재청도 단골이다. 팔만대장경에 사용되는 못, 수원 화성, 창경궁, 경복궁, 숭례문 등 복원작업 때마다 필요한 도구를 이들 형제에게 부탁한다.

매주 수·목요일엔 상남씨 혼자 형제대장간을 지킨다. 형 상준씨가 충남 부여의 한국전통문화대학에 강의를 하러 가기 때문이다. 상준씨는 “대장장이 일이 금방 배울 수 있는 기술도 아니고 10년 이상 해야 하는데 관심을 갖는 젊은이들이 생겨서 기특하다”면서 “대장간 일이 큰돈을 벌어주진 못해도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다”고 말했다.

“후회한 적 있냐고요? 배운 게 이거밖에 없어서 힘들다고 생각한 적은 있어도 다른 생각은 안해봤어요. 아마 죽을 때까지 이 일을 하지 않을까 싶어요.”

류씨 형제에겐 다른 길이 없었다. 그렇게 길 없는 길을 상준씨는 50년, 상남씨는 형과 함께 20년 걸었다. 문득 뒤돌아보니 거기에 새 길이 나 있었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497호(2017년 7월19~25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