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금융소비자연맹, 녹색소비자연대 등 7개 단체가 실손보험 청구간소화 촉구를 위한 성명서를 발표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이종철 기자
[실손 간소화 무산되나-①] 증빙서류 발급절차·비용부담 떠안아야 
10년 묵은 실손의료보험 청구 간소화 도입이 또 무산됐다. 의료계 반대로 20대 국회 정무위원회 법안소위에서 논의조차 되지 못했다. 결국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 법안은 21대 국회에서나 다시 추진해야 할 상황에 놓였다.

올 상반기 기준 중복가입을 제외한 실손보험 가입자 수는 3800만명에 이른다. 의무보험인 자동차보험 가입자수(약 2100만명)의 두배 수준이다. 사실상 ‘제2의 건강보험’으로 성장한 실손보험의 보험금 청구 절차를 지금보다 간소화하려는 보험업계와 금융당국의 노력이 이해되는 이유다.

가입자가 많은 만큼 가입자들의 실손보험금 청구에 대한 경험담도 가지각색이다. 실손보험 가입자들은 청구 간소화를 두고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보험설계사를 통해 소개받은 실손 가입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청구 절차, 너무 번거로워”


#. 아픈 곳이 없어 1년 중 병원 갈 일이 거의 없다. 그나마 감기몸살에 걸리면 병원에 가서 수액주사 맞고 약 타먹는 정도다. 이때 발생하는 실손보험금은 1만원 내외. 이마저도 영수증과 진단서 챙겨 보험금을 청구하면 받을 수 있지만 번거로움을 이유로 쉽게 실행에 옮기기 못한다. 사실 이런 진료비 받으려고 실손에 가입한 것인데 혜택을 ‘내가 너무 못 챙기고 있나’하는 생각도 든다. 병원이 알아서 서류를 보험사에 보내주고 소액이라도 보험금을 챙길 수 있으면 나같은 가입자에게는 좋은 일 같다. (30대 회사원 정모씨)

그래픽=머니S 김민준 기자

#. 자녀부터 남편까지 가족의 모든 실손보험 청구를 내가 한다. 그런데 이 서류 챙기는 일이 정말 힘들다. 보험금을 청구하려고 병원에서 관련 서류를 받아 보험사에 제출했는데 진단명이 없단다. 진단명을 받기 위해선 의사소견서를 다시 발급받아야 했다. 서류 발급비용도 만만찮다. 이것 저것 다 받으니 10만원이 넘었다. 큰 병원에서는 ‘여기 가봐라, 저기 가봐라’며 한곳에서 서류를 다 발급해주지도 않는다. 서류 챙기다 뒷목을 잡을 수밖에 없다. 병원은 “서류를 보험사에 보내는 행정업무을 왜 떠안아야 하냐”며 실손 청구 간소화를 반대한다고 들었다. 서류 발급 시 드는 비용을 차라리 수수료로 낼 테니 대신 해줬으면 좋겠다. (40대 주부 서모씨)
보험연구원에 따르면 실손보험 가입자 중 치료를 받고도 보험금 청구를 하지 않은 이유를 조사한 결과 90.6%가 ‘금액이 소액이어서’, 5.4%는 ‘번거롭기 때문’이라고 각각 응답했다. 대부분의 실손 가입자들이 소액인 점과 보험금에 비해 절차가 번거로워 청구를 포기한다. 이들에게 실손 청구 간소화는 희소식이 될 수 있다.

◆“보험금 부지급 많아질 것” 우려

#. 지난해 아이가 아파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 이때 여러가지 치료와 함께 비타민D주사를 맞았는데 보험사에서 해당 주사는 치료가 아닌 영양제여서 실손보험금을 줄 수 없다고 했다. 병원 측에서 실손처리된다고 해 비타민D주사를 맞았는데 황당했다. 지인은 의사소견서를 받아오니 비타민D주사도 보험금을 줬다고 했다. 실손보험금 청구 과정에서 이것저것 따지는 깐깐한 소비자 말고는 모두 호구 취급당하기 십상이다. 청구 간소화가 되면 비타민D주사는 전산상 영양제로 자동분류돼 보험금이 안 나올 것이다. 하지만 나처럼 병원에서 실손처리된다고 하면 많은 가입자가 치료를 받지 않을까. 보험사를 못 믿겠다. 내 눈으로 내가 직접 관련 서류를 보내고 담당자와 이야기를 해야 안심이 될 것 같다. (50대 자영업자 김모씨)

#. 지난해 초 건강검진을 받고 유방에 섬유선종이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당시 의사는 치료할 단계가 아니니 주기적으로 검사하자고 했었다. 올해 유방 관련 진료를 받기 위해 병원치료를 받았고 실손보험금을 청구했는데 상당부분이 감액됐다. 섬유선종 진단을 받은 것을 고지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실손 청구 간소화 시 환자 진료정보가 보험사에 흘러가면 보험금 부지급이 지금보다 더 많아질 것 같다. (30대 직장인 박모씨)


의료계는 보험사가 장기적으로 고객 질병데이터를 수집해 보험금 미지급에 활용하려는 속셈이 있다며 도입을 반대하고 있다. 실제로 일부 가입자들은 보험사가 청구과정에서 보험금을 안주려는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는 데 이때 자동 청구가 그들에게 이롭게 작용할 것이란 우려를 보였다.

#. 어머니의 지인 설계사를 통해 실손보험금을 청구한다. 직접 보험사에 청구해본 적이 없다. 영수증이나 진단서를 받으면 사진을 찍어서 어머니에게 문자로 보낸다. 그러면 어머니가 설계사에게 전달해 보험금을 청구해왔다. 어머니 말로는 설계사가 못 받을 보험금까지도 잘 청구해서 받아준다고 했다. 치료받으러 갈때 설계사분이 ‘도수치료 받을 때 병원에서 ‘몇회 패키지’로 받아야 실손처리 시 유리하다’고 조언까지 해준다. 자동 청구되면 설계사가 해주는 이런 혜택들은 못 받는 것 아닌가? (20대 대학생 조모씨)

실손보험 가입자 상당수가 설계사를 통해 가입해 관리를 받는다. 어머니를 통해 보험가입한 비율이 높은 10~20대는 실손 청구 간소화에 대한 필요성을 아직 피부로 느끼지 못할 수 있다. 설계사는 고객관리 차원에서 가입자가 받을 수 있는 최대한에서 보험금을 받을 수 있게 청구를 해주는 편이다. 이는 더 많은 고객을 유지하고 유치해야 하는 설계사 입장에서 당연한 행위다.

A보험사 소속 한 설계사는 “본사 실적 압박이 심하니 이러한 고객관리를 해주는 것 아니겠냐”라며 “이 경우 보험금 청구 간소화에 대한 인식자체가 무뎌질 수 있다. 보험사는 청구 간소화를 원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소속 설계사들의 고객관리가 자동청구 도입에 일부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보험업계와 의료계 간 ‘밥그릇 싸움’ 양상으로 전개되는 실손 청구 간소화 도입 여부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3800만명 실손 가입자들의 목소리다. 김종명 내가만드는복지국가 팀장은 “과거와 달리 더 많은 국민들이 실손 청구 간소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며 “무조건 실손 청구 간소화가 돼야한다기 보다는 가입자들의 목소리가 더 담긴 제도가 시행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622호(2019년 12월10~16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