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4일 서울 영등포에 위치한 한국비정규노동센터를 찾아 김성호 노무사를 만났다. 사진은 김성호 노무사가 인터뷰를 진행하는 모습. /사진=김성아 기자
지난 24일 서울 영등포에 위치한 한국비정규노동센터를 찾았다. 손때 묻은 법률 서적이 빼곡히 꽂힌 책장, 영화 '카트'와 '또 하나의 약속'에서 보던 풍경 그대로였다. 이곳에서 만난 김성호 노무사는 '사장님의 노무사'가 아닌 '노동자의 노무사'다. 그는 어떤 사용자(사측)의 사건도 수임하지 않는다. 노사간의 불균형한 운동장에서 노동자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논리를 찾고 법적 실천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때문이다.

그가 회장으로 있는 '노동인권실현을 위한 노무사모임'(노노모)은 사용자 사건을 수임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단체 차원에서 지키고 있다. 그는 "노동법에는 중립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깨달음에서 이 길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채권과 채무의 관계처럼 형식적 평등이 적용되는 민법과 달리 노동법은 애초에 구조적으로 불균형한 관계를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그는 "노동자가 언제나 옳고 선하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사용자와 노동자는 처음부터 같은 위치에 서 있지 않다. 이 간극을 조율하는 게 노동법이고 그래서 중립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고 설명했다.
김 노무사는 산업재해, 임금체불, 플랫폼 노동자의 노동자성 문제에도 관심을 갖고 활동하고 있다. 사진은 구의역 스크린 도어 사고 8주기를 맞아 서울 광진구 구의역 9-4 승강장에서 열린 희생자 김군의 생일 기억식에서 참석자들이 추모 메시지를 떼어내고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
그는 노동자들의 산업재해 문제에 관심을 갖고 활동하고 있다. 계기는 2013년 1월 발생한 성수역 사고였다. 당시, 김 노무사는 사고 발생 몇 시간 지나지 않아 현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사고 현장은 이상할 정도로 평온했다. 그는 "한 사람이 죽었는데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지하철은 흔적도 없이 치워져 있었고 사람들은 무심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날 이후 우리의 일상에 수많은 노동자의 죽음이 스며들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고 했다.


이후로도 노동자들의 죽음은 반복됐다. 2016년 5월,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 9-4 승강장에서 스크린도어를 정비하던 19세 청년이 숨졌다. 2년 전 강남역에서도 판박이 사고가 있었다. 지난 19일, 경기 시흥 SPC삼립 시화 공장에서는 50대 여성 노동자가 기계에 끼여 목숨을 잃는 사고가 발생했다. SPC그룹 계열사에서 끼임 사고로 노동자가 사망한 것은 2022년 10월과 2023년 8월에 이어 세번째다.

효율성만 강조하는 노동 구조, 그 안에서 '죽음의 패턴'은 반복됐다. 떨어지거나, 끼이거나, 치이는 정형화된 노동자의 사고는 "막을 수 있다"는 사실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했다. 김 노무사는 "모두가 예고된 인재(人災)였다"며 "사고가 발생하면 기업은 늘 노동자의 실수를 탓한다. 하지만 실수해도 죽지 않게 하는 것, 그게 기업과 정부가 할 일 아니냐"고 반문했다.

김 노무사는 산업재해뿐 아니라 임금체불, 플랫폼 노동자의 노동자성 문제에도 관심을 갖고 활동하고 있다. 특히 임금체불을 심각한 문제로 꼽았다. 경제규모 세계 13위인 한국은 지난해 체불 임금 규모 사상 최대인 2조448억원을 기록했다. 경제규모 1위인 미국의 7배, 4위인 일본의 10배에 달할 정도로 막대하다.
"산재·임금체불의 뿌리엔 '미약한 처벌' ,'교섭력 부재' 있다"
김 노무사는 이처럼 사업주들이 안전한 일터를 제공하지 않거나 제때 임금을 지급하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는 '처벌의 미약함'과 '교섭'의 어려움 때문이라고 말했다. 사진은 전국금속노동조합 광주전남지부가 지난 22일 오전 광주 광산구 광주고용노동청 앞에서 '안전조치 부재, HD현대삼호 후진국형 중대재해 규탄' 기자회견을 열고 추락사고로 사망한 노동자의 유족과 함께 HD현대삼호의 안전 관리 체계를 규탄하는 모습. /사진=뉴시스
김 노무사는 이처럼 사업주들이 안전한 일터를 제공하지 않거나 제때 임금을 지급하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는 '처벌의 미약함'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예방은 기본적으로 비용이 투입돼야 가능한 일인데 현재 구조에서는 처벌이 약하니 예방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중대재해처벌법이 만들어진 지 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노동자가 죽는 사고는 계속되고 있다"며 "형량은 높게 규정돼 있지만 대다수 사건은 무죄이거나 벌금형으로 끝난다"고 덧붙였다. 고용부에 따르면 2022년 1월 법 시행 이후 지난해 말까지 3년 동안 경영책임자의 유죄가 확정된 사례는 15건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실형이 선고된 경우는 1건(집행유예 14건)에 그쳤다.

반복되는 노동 문제의 또 다른 이유로는 '교섭력 부재'를 꼽았다. 산업재해나 임금체불 등의 근저에는 노동자가 사용자와 협상할 수 없는 구조가 자리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한국의 노동은 크게 두 축으로 나뉜다. 국가가 최저임금이나 근로 시간 등 기본 기준을 설정하는 '개별 노동관계'와 노사 스스로 조건을 협의하는 '집단 노동관계'가 그것인데 후자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짚었다.

헌법 제32조는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가 최저 기준을 마련하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이 기준만으로는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 어렵다. 그래서 그는 노동자가 자율적으로 노동조건을 개선할 수 있는 집단 교섭권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그는 "헌법 33조는 노사가 대등한 위치에서 자율적으로 노동조건을 정하도록 보장하고 있지만 한국은 집단 노사관계가 취약하다. 노동조합을 만들기도 어렵고 만들어도 사용자가 교섭에 응하지 않거나 오히려 손해배상 청구, 업무방해 고소 등으로 조합을 압박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라고 설명했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한 해법으로는 이른바 '노란봉투법'으로 알려진 '노동조합법 2·3조 개정'을 들었다. 이 법안은 노조법상 사용자 범위를 원청업체까지 확대하고(2조), 파업 노동자에 대한 사용자의 손해배상 청구를 제한(3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교섭권이 실질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법적·제도적 기반을 강화하자는 취지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뿐 아니라 '노동하기 좋은 나라' 만들어야"
김 노무사는 차기 정부가 '노동하기 좋은 나라'를 만드는 데 주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진은 민주노총 화물연대본부 조합원들이 지난 19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국회의사당역 앞에서 열린 '확대간부 결의대회'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는 모습. /사진=뉴스1
김 노무사는 차기 대통령이 '노동하기 좋은 나라'를 만드는 데 주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민주노총, 한국노총을 비롯한 노동계는 이미 수십, 수백건에 이르는 정책 제안을 해왔다. 문제는 이 요구들이 정치의 우선순위에 좀처럼 오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라고 말했다.

그 이유는 많은 정치인이 노동자 보호 정책을 여전히 '기업 활동에 대한 규제'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정치권이나 경영계는 노동 정책을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이 아닌 기업을 옥죄는 법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헌법은 인간의 존엄성과 행복추구권, 노동 3권을 분명히 보장하고 있고 이는 마땅히 보호받아야 할 권리다"라고 주장했다.

김 노무사는 이러한 인식의 한계가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와도 맞닿아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오늘날 한국 사회를 '분절 사회'로 진단한다. 그는 "효율성이라는 명분 아래 하나의 마디가 다른 마디와 연결되지 않도록(분업) 노동 구조가 설계됐다. 그 속에서 타인의 노동에는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는, 무관심을 부추기는 구조가 정착됐다. 타인의 노동을 인식할 기회는 줄어들고 노동자의 고통은 일상에 더 은밀하게 스며든다. 결국 노동자 보호는 뒷전으로 밀리게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노동 문제는 사회 전체의 지속 가능성과 직결되는 문제라고 짚었다. 한국의 임금근로자는 약 2200만명으로 전체 인구의 45%에 달한다. 국민 절반 가까이가 노동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사회인 만큼 누군가의 노동이 없으면 나의 생활도 온전하게 유지되지 않는다.

그는 "우리는 누군가의 노동에 의존해 살아간다. 내가 타는 지하철, 내가 쓰는 전기, 내가 먹는 음식에도 누군가의 노동이 깃들어 있고 때때로 그 노동에는 죽음이 스며 있다"며 "기업하기 좋은 나라, 물론 필요하다. 그러나 그만큼 중요한 건 노동하기 좋은 나라다. 헌법은 국민 모두의 생존권을 선언했지만 현실에서 생존의 조건은 여전히 자본이 결정하고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