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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루탄이 멈춘 청춘━
이한열 열사의 죽음은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이 열사는 연세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1987년 6월9일 연세대학교 교정 앞에서는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가 열린 후 학생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경찰은 해산을 명령하며 최루탄을 발사했고 그중 하나가 이한열의 뒤통수에 정통으로 맞았다. 최루탄은 머리뼈를 관통했고 그는 즉시 의식을 잃은 채 세브란스병원으로 이송됐다.그의 부상 소식은 곧 국가적인 관심을 끌었다. 언론은 검열 하에서도 이한열의 부상 사실을 보도했고 병실 앞에는 하루가 멀다고 학생들과 시민들이 찾아와 그가 깨어나기를 기도했다. 하지만 부상은 너무나 치명적이었다. 한 달 가까운 혼수상태 끝에, 그는 1987년 7월5일 오전 2시5분 끝내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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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만명의 발걸음, 민주주의를 향해━
이한열 열사의 장례는 1987년 7월9일 '민주국민장'으로 치러졌다. 이례적으로 종교·노동·학생·시민사회가 연대해 진행한 전국적인 장례 운동이었다. 운구 행렬은 연세대학교 본관과 신촌 로터리를 거쳐 서울시청, 광화문을 지나 광주로 이동했다. 운구 행렬이 지나는 동안 서울 100만명, 광주 50만명 등 전국에서 약 150만명이 추모 시위와 장례 행진에 동참했다.━
한 청년의 희생, 체제를 바꾸다━
이한열의 죽음은 이미 격화하고 있던 민주화 운동의 도화선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6월 항쟁은 한창이었고 그의 사망 이후 전국 각지에서 분노의 물결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이한열이 쓰러진 6월9일부터 그의 장례가 치러진 7월9일까지 한 달간은 그야말로 민주주의를 향한 국민의 집단적 열망이 정점을 향해 분출되던 시기였다. 6월18일 '최루탄 추방 대회', 6월26일 '국민평화대행진'으로 이어진 시위는 갈수록 그 규모와 강도가 커졌고, 군부 정권은 계엄령 선포까지 고려할 만큼 위기감을 느꼈다.결국 6월29일 노태우 민정당 대통령 후보가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하겠다고 발표하며 6월 항쟁은 역사적 승리를 이뤘다. 이 열사의 죽음은 한 개인의 희생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제도화를 이뤄냈다. 오늘날까지도 '민주주의는 피 없이 오지 않는다'는 교훈을 각인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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